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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앙코르 내 인생]한국은행 간부서 사회복지전문가 된 서병수(65)씨

'범생이' 시절 봉사 활동하며 엿본 밑바닥 현실
술값 치를 때마다 얼마 냈는지 모르게 했던 '까만 비닐봉지'는 우리만의 헌금함이었다
IMF 격랑이 나를 덮쳤다… 그 기억이 어려운 이웃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40대 중반 한국은행 재직 시절 직원 교육을 하는 모습

"자, 우리 부담 갖지 말고 되는 대로 조금씩 정성만 보태자고요."

1990년대 초, 성당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었다. 주일마다 봉사 모임이 끝나면 달동네에 사는 젊은 교인 몇몇과 막걸리를 마셨다. 술값을 치를 때면 까만 비닐봉지가 등장했다. 서로 얼마 냈는지 알 수 없게 하는 우리만의 헌금함이었다. 그들의 넉넉지 않은 사정을 뻔히 알기에 나는 1만원짜리 배춧잎을 검은 봉투에 몰래 쑤셔 넣곤 했다. 봉투를 열어보면 늘 1만3000원 안팎이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했던 이들이었지만 빈곤은 심하면 심해졌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당시 나는 '신(神)의 직장'이라고 불리던 한국은행에 다니고 있었다. 입사 20년차가 넘어 차장으로 있을 때다.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다니던 '철없는 범생이'에게 '까만 비닐봉지 사건'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경제학을 배운 나는 거시경제 성장이 이뤄지면 복지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될 거라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봉사활동을 하면서 본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동안 현실을 모르며 숫자 놀음이나 한 건 아닐까, 자괴감이 들었다.

봉사를 하면서 맞닥뜨린 밑바닥 현실을 보면서 1995년 한 대학의 가족치료상담과정에 등록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전문성을 갖춰 봉사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회사일이 끝나면 곧장 학교로 달려갔다. 이후 주말마다 상담소에 가서 상담활동을 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인생 이모작의 씨를 이미 뿌리고 있다는 것을.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격랑(激浪)이 내 인생을 덮쳤다. 나는 1998년 1월 한국은행에서 분리된 은행감독원의 전산실장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1년이 채 되지 않아 1998년 말 은행감독원이 금융감독원에 통합되면서 자리가 없어졌다. 내 나이 쉰둘. 억울하고 섭섭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괴감과 자책감이 앞섰다. 만약 내가,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이 조금만 더 철저히 금융기관의 방만한 경영을 감독했다면 국가적인 재앙이 왔을까 싶어 괴로웠다.

그래서 미련과 억울함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직장을 나오니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금융 쪽에 빌붙어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상담하던 경력을 살려 복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999년 사회복지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늦게 시작한 공부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꼴딱꼴딱 밤을 새우기도 여러 번이었다.

영등포 노인종합복지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서병수씨가 컴퓨터 수업을 듣는 노인을 지도하고 있다. /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학교에 다니면서 신림종합복지관에서 상담봉사 활동을 했다. 3개월쯤 지났을까, 복지관장이 나를 불렀다. "저, 서 선생님 혹시 저희 복지관에서 행정관리 업무를 맡아 보시지 않겠어요? 저희가 많이는 못 드리고 월 100여만원은 드릴 수 있는데." 거절했다. 돈 받고 하는 봉사라는 게 어딘지 꺼림칙했다.

3개월 뒤 관장이 또 한번 자리를 제안했다. 나의 직장 경험을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어서 이번에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1999년 9월부터 신림종합복지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하루 왕복 120km를 오가는 출퇴근 거리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일이 재미있었다. 저소득 노인들끼리 팀을 짜서 서로 음식을 해주고 청소도 하는 노·노(老·老)케어 등을 도입했다. 은행에서 일한 경력을 살려 후원금 모금에도 앞장섰다. 복지관의 예산과 회계관리 시스템도 제대로 다시 짜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껏 해온 그 어떤 경제 관련 일보다도 훨씬 사회에 보탬이 되는 생생한 일이었다. 그렇게 경력을 쌓다 보니 영등포노인종합복지관에서 나를 불렀다. 2003년 3월부터 젊은 직원들과 함께 1400여명의 노인을 직접 돌보고 있다.

공부의 끈도 놓지 않았다. 박사 과정에 들어가 5년 동안 논문 수백 편을 읽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한다고 주말은 아예 없어졌다. 논문을 쓰면서 빈곤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와 이론에 눈떴다. 박사 학위를 받고 보니 어느덧 환갑이 됐다.

주위에서 많은 분이 입버릇처럼 말한다. "퇴직하고 나서 사회봉사나 좀 해야지." 그러나 사회봉사를 취미생활로 여겨서는 안 된다. 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현장에서 그런 분들은 오히려 짐이 된다. 봉사도 전문성이 필요하다. 인생 이모작을 봉사로 짓겠다는 사람들은 꼭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심심풀이 2막이 아니라, 제대로 된 2막을 살 수 있다.

한국은행원으로 산 내 인생 1막은 우리 경제의 '성장'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삶이었다. 사회복지 전문가로 내디딘 인생 2막의 무게 중심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로 넘어갔다. 올해 말이면 관장 임기가 끝난다. 내년부터는 한국빈곤문제연구소로 옮겨서 체계적인 복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나의 꿈이다. 외국의 경제학자나 복지학자들도 나이가 들수록 빈곤 연구의 대가가 된다. 나는 지금 인생 3막의 돛을 올릴 꿈에 부풀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