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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책

봉고차 人文學, '88만원 세대'의 돌파구를 뚫다

학자금 대출 3만2000달러 안고 졸업한 켄 일구나스의 모험기
알래스카서 막노동으로 빚 갚고 봉고차서 생활하며 대학원 공부
"난 아이디어와 진실의 富者" 듀크大 대학원 대표졸업연설도


	'봉고차 월든'
봉고차 월든(Walden on Wheels) | 켄 일구나스 지음 |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408쪽 | 1만4800원

대한민국 청년 세대만 우울한 게 아니다. 전 세계가 마찬가지다. 여기 이 미국 젊은이의 육성을 들어보자.

"우리 세대는 지도의 거의 모든 빈 공간이 채워지고, 너무나 많은 야생 지대에 포장도로가 깔리고, 마음껏 싸울 명예로운 전쟁이나 정착할 변경도 없는 이상한 시대에 태어났다.(…) 우리는 칸막이 안의 원숭이이자 대출금 상환 로봇이다. 망가진 세대다."

맞서 싸울 독재정권도, 극복할 자연도 남아있지 않은 세상. 재력가 부모가 없다면 학자금 대출로 대학을 다녀야 하고, 힘들게 졸업장을 따더라도 괜찮은 일자리는 가뭄에 콩 나듯 귀한 시대.

단순히 그런 시대에 대한 불평이나 분노로 그쳤다면, 이 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봉고차 월든'은 실용(實用)과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인문학 학사 학위(역사학·영문학), 그리고 3만2000달러의 학자금 대출액만 부여잡고 뉴욕주립대 버펄로 캠퍼스를 졸업한 청년 켄 일구나스〈사진〉의 악전고투 인생 모험기다. 주의할 것. 로또 같은 인생 역전기가 아니라,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고군분투기다. 그런데 즐거운 교훈과 자발적 성찰이 있다. 무일푼 자수성가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의 계몽이 아니라, 유머와 재치 넘치는 청년 세대의 활력이 이 안에 있다.


	켄 일구나스.
등록금으로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켄은 방학이면 대형 마트의 카트를 밀었다. 15대 넘는 카트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카트 주차장으로 몰고가는 그 아르바이트 말이다. 대학 4학년 때 켄은 프린스턴, 예일 등 명문 대학원 10곳과 전국 유명 신문사 25곳에 인턴을 지원했지만, 결과는 0승 35패. 켄은 결심한다. 막연한 선망의 대상이었던 알래스카로 떠나 새 삶을 개척하기로. 이후 4년간 켄은 알래스카주 북쪽 끝인 콜드풋의 시간당 최저임금 노동자, 캐나다 온타리오강 1600㎞를 카누로 거슬러 올라가는 뗏목 여행자, 콜드풋에서 고향인 뉴욕주 나이아가라 폴스까지 8000㎞를 남의 차 얻어 타고 돌아오는 히치하이커였다.

숙식 제공의 트럭 휴게소 청소원, 모텔 잡역부, 여행가이드로 살면서, 켄은 총수입의 82%를 저축했다고 한다. 100만원을 벌면 82만원을 모았다는 얘기다. 1년에 2만2000달러까지 번 해도 있다고 한다. 마을 전체 상주 인구가 35명, 가장 가까운 쇼핑몰이 400㎞ 떨어져 있는 오지(奧地)의 삶. 식비와 월세를 없애면 얼마나 많은 돈을 저축할 수 있는지, 본인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소박하고 검소하며 거의 무소유에 가까운 생활방식을 이 기간에 배웠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멈췄다면, 그는 중세의 수도승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이 책 원제의 '월든'은 주지하다시피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의 고전 '월든'이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월든 호숫가로 들어가 통나무집을 짓고 자급자족의 삶을 살았던 그 자연주의자 말이다. 자발적 소외의 은둔주의자로 오해받는 소로를, 켄은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그의 통나무집은 마을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고, 비밀스러운 삶이 아니라 문명 세계와의 소통을 통해 깨달음을 전파하려고 했다는 것 말이다. 타인의 인생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켄의 다짐도 여기서 비롯됐다.

그는 이후 듀크 대학의 대학원 인문학 과정에 등록했고, 주차장에 세워 놓은 봉고차에서 2년 넘게 숙식을 해결하며 두 가지 공부를 한다. 하나는 외로움과 검소함, 그리고 물 없이 주전자와 팬을 설거지하는 법에 대한 공부였고, 또 하나는 인문학 공부. 디오게네스, 루소, 글쓰기, 말하기, 생각하기의 방법. 결국 두 줄기 강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 흘러가듯이, 머지않아 이 공부도 하나로 합쳐졌다고 한다.


	켄 일구나스는 지금도 차 한 대에 몸을 싣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고 있다. 충만하며 영감 넘치고 지조 있는 삶을 위하여.
켄 일구나스는 지금도 차 한 대에 몸을 싣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고 있다. 충만하며 영감 넘치고 지조 있는 삶을 위하여. /Getty Images 멀티비츠
듀크대 대학원을 졸업할 때, 그는 학자금 대출을 모두 청산하고도 1156달러가 수중에 남아 있었다. 자신이 발표한 체험기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켄은 스타가 됐고, 졸업식에서는 대표연설까지 했다. 단순히 빚이 없거나, 커다란 승합차 안에서 돈을 아끼고 산다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반성을 하는 시간과 자신을 묶어두었던 그물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30대 초반인 데다 아직 싱글인 켄이 어떤 미래를 살게될지 예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어떤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믿는 구석'이 있다고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환율 없는 통화'이자 '녹슬지 않는 주화'. 즉 소비해버릴 수 없는 자본인 아이디어와 진실의 부유함이다. 충만하면서 영감 넘치고 지조 있는 삶. 지갑은 비어있을지언정, 나이가 많든 적든, 국내든 해외든, 집이 있든 없든, 돈이 많든 적든, 살아있는 마지막 그날까지 이 부유함을 간직할 수 있겠다는 것. 청년 세대는 물론, 그의 부모 세대가 먼저 읽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