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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책

하버드? 말 잘듣는 양떼일 뿐

스탠퍼드·예일 등 美명문대생 내면엔 두려움·공허함 가득해
성적 중심의 엘리트 교육 구조, 공부만 하는 '헛똑똑이' 만들어
한국에도 비슷한 현상 나타나

공부의 배신 책 사진

 

공부의 배신

윌리엄 데레저위츠 지음
김선희 옮김|다른|344쪽|1만6000원


 

새로 임용된 40대 서울대 교수가 이런 푸념을 한 적이 있다. "요즘 서울대생들은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똑똑하고 단정한데, 괴짜는 없어." 교수는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신입생 입학 정원이 3000명 수준으로 대폭 줄면서 '합격 커트라인' 아슬아슬한 학생들이 예전과 달리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배짱 있는 학생들'이 연·고대에서 창의적인 인재로 성장하고 있을 거라 추정했다.

그 이튿날 우연히 연세대 교수를 만났다. 놀랍게도 연대 교수 역시 같은 푸념을 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전부 모범생이야. 점수 따는 데는 귀신인데 질문이 없어." 그렇다면 이 '배짱 있는 괴짜', 역설적으로 '창의적 인재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예일대 영문과 교수를 지낸 윌리엄 데레저위츠(deresiewicz)는 자신의 책 '공부의 배신'(부제: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에서 창의적 인재들이 사라진 게 아니라고 반박한다. 엘리트 교육 시스템과 사회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 명문대의 소위 '수퍼 피플'이라 불리는 학생들이 실제로는 '똑똑한 양떼'(Excellent Sheep)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하버드, 예일. 스탠퍼드, 컬럼비아, 브라운대에 입학하는 젊은이들을 보라. 복수 전공을 이수하고, 스포츠에 능숙하며, 악기를 다룰 줄 알고, 외국어를 몇 개씩 구사하며, 지구 저편에서 봉사활동을 해 본 적이 있고, 긍정적인 취미도 몇 개씩 갖고 있는 수퍼 피플이다. 하지만 이 '수퍼'의 허울을 들추면 외롭게 몸을 드러내는 명사와 형용사가 있다. 두려움, 불안, 좌절, 공허함, 목적 없음, 고독….

공부에는 귀신인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남들이 선망하는 목표를 따라하는 데 익숙한.

캠퍼스가 아니라 컴퍼니가 돼버린 대학, 엘리트는 투자 회사나 컨설팅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 부모, 투자수익률로만 주판알을 튕기는 사회….

 

스탠퍼드대학에는 '스탠퍼드 오리 신드롬'이 있다고 한다. 바깥에서 볼 때는 고요하고 차분한 모습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모두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자학(自虐)이다. MIT의 한 2학년 학생은 학내 게시판에 '멜트 다운(melt down)'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원래 멜트 다운은 원자로의 노심이 녹아버리는 현상. 그에게는 자신을 포함한 MIT 학생들의 수치심, 생의 무의미함, 이따금씩 찾아오는 압도적인 외로움의 다른 표현이었다. 가련한 헛똑똑이들.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은 아예 회피하기 때문에 실패할 일이 없고, 자신이 잘 알고 있고 아주 잘하는 것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네 열정을 찾아라'라고 주문하지만, 이 아이들은 어떻게 열정을 찾아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 책은 결국 옐로카드이자 메시지다. 허울뿐인 엘리트 교육에 대한 분노이고, 캠퍼스인지 컴퍼니인지 헷갈리는 대학에 대한 고발이며, 대안을 찾지 않으면 국가의 미래가 불투명할 거라는 경고다. 특히 공적 기관으로서의 유효기간이 임박한 듯한 미국 명문 대학에 대한 고발은 신랄하다. 전인교육은커녕 이윤 창출이 가능한 연구만 성배(聖杯)를 독차지하는 대학. 작가는 학생들이 대학에서 humanities 대신 amenities만 얻는다고 비꼬았다. 인문학(humanities)을 배우는 게 아니라 호화로운 신축 기숙사, 체육관, 학생센터 등 편의시설(amenities)만 누린다는 것이다.

똑똑하지만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린 엘리트에 대한 흥미로운 방증(傍證)이 있다. 저자는 조지 부시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서도 1988년 전당대회에서 다퉜던 마이클 듀카키스와 부시의 논쟁을 예로 들었다. 하버드 법대 출신의 듀카키스가 부시를 놀린다. "이 선거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선거는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부시는 이렇게 반박했다. "능력은 기차를 제 시간에 가게 만들지만, 기차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선도할 수 있는 리더들을 길러내는 것이 관건이다. 새로운 엘리트를 개발하지 않으면 미국의 미래는 없다고 데레저위츠는 단언한다. 어떤가. 이 모든 것들이 정말 미국의 사례로만 들리시는가.

Excellent Sheep: The Miseducation of the American Elite and the Way to a Meaningful Life Hardcover – August 19, 2014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