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황태자 영친왕, 미국 이민 희망했었다 |
‘과연 나는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나 자신도 국적을 알 수 없다’
‘왕궁 등 한국내 재산 고국에 돌려주고 일본내 재산 처분하고 싶다’
‘재정 여건이 되면 미국 영주권 얻고 싶고 아들도 미국서 공부시키겠다’
미, ‘한국내 재산은 한국 정부 소유, 일본내 재산은 한-일 양국 협의해야’
미, ‘한국 및 일본 국적법에 의해 영친왕은 일본 국적이 명백’
‘대조전, 인정전 등 궁궐과 전각은 내 재산’ 영친왕 재산목록도 눈길
영친왕 일본 저택은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별관, 참의원 의장공관 대여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던 영친왕 이은이 해방 직후 자신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의 이민의사를 미국측에 밝혔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영친왕 이은./조선일보DB
-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영친왕 이은은 1897년 고종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나 1907년 이복 형인 순종이 즉위한 뒤 황태자에 책봉됐고 1926년 순종 사망 뒤 왕위를 계승, 제2대 이왕에 즉위했었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황태자 책봉 직후 10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 마사꼬(한국명 이방자)와 결혼했으며, 일본군 제51사단 사단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격랑의 시대를 헤쳐온 비운의 황태자였습니다. 사정이 이랬기에 해방을 맞이한 영친왕 이은은 과연 자신의 국적이 어디인지, 스스로도 깊은 회의에 빠졌던 것입니다.
-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중 영친왕이 자신의 국적 및 재산, 장래 계획에 대해 설명한 부분.
이어서 영친왕 이왕은 충격적인 소망을 밝히게 됩니다. ‘재정적 여건이 허락한다면 미국에 장기간 체류하거나 영주권을 얻고 싶다. 지금 16세인 아들(1931년생인 차남 이구를 의미)도 미국에서 교육시켰으면 좋겠다’ 는 소망이었습니다. 일본내 재산을 모두 팔아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미국 측에 통보한 것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10살때 일본으로 끌려간 뒤 타의에 의해 일본 황족으로 살아오다 마침내 조국 해방을 맞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어정쩡했기에 결국 미국 이민을 가려했던,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경계인 이은의 고민이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영친왕 이은의 이같은 고민에 대해 맥아더의 정치고문 세발드는 같은 전문에 극동사령부의 견해를 담았습니다. 영친왕 면담때 극동사령부의 담당 참모를 배석하게 했고, 그들과의 논의와 영친왕 관련서류 및 법규 검토를 마친 뒤 그 내용까지 포함해서 국무부에 보고한 것입니다.
-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중 세발드가 '영친왕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언급한 부분.
-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에 포함된 영친왕 재산목록.
-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에 포함된 영친왕의 재산목록을 재정리한 것.
일본내 재산과 한국내 재산으로 나뉘어 기록된 이 재산목록에서 영친왕은 일본 아카사카내 저택과 토지 등 모두 6개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며 주소와 건평, 건립연도, 현시가(단위: 엔화)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 한국내 재산으로는 창덕궁내 대조전 등 궁궐과 종묘, 토지 등 모두 17건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돼 있습니다. 이 재산목록에 기록된 영친왕의 재산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조전, 순정전, 인정전, 낙선재, 동명전, 명정전, 함영전 등의 궁궐내 전각과 종묘정전, 종묘, 사찰, 토지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또 소재지는 지금은 거의 잊혀진 지명이 돼 버린 와룡동, 훈정동 등으로 기록돼 있으며 경기도의 서울이라고 표기돼 있습니다.
-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중 영친왕의 재산 소유권에 대한 해석.
- 1929년 10월 신축돼 영친왕이 거주했던 일본 동경 아카사카의 4층 저택. 후에 프린스호텔 별관이 된다.
세발드는 또 한국 정부는 영친왕의 일본내 재산에 대해 (대한제국의) 황실이 이땅을 사고 건물을 짓기 위해 많은 돈을 지출했으므로 한국 국유재산으로 이해하고 있고 서울의 왕궁 등은 영친왕 이은의 이름이 아니라 이왕직 장관의 이름으로 등록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세발드는 이 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친왕 이은의 일본내 재산처분에 대해 현재 극동사령부는 아무런 입장이 없으며 한국정부가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이 문제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 문제는 한·일 양국 정부가 해결할 문제’라고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한·일 양국이 해결할 문제이므로 극동사령부가 골치아픈 문제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발드는 이 전문에 한국국적법, 영친왕의 한국과 일본내 재산목록, 1947년 10월 11일의 극동사령부 명령, 1948년 1월 21일의 영친왕 자택 임대 관련 승인서류 등을 첨부했습니다.
- 미 국무부 한국대표부가 1948년 11월 6일 미 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또 이 전문에 동봉된 11월 5일자 보고서는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대표부는 이은 왕자의 국적문제에 대해 1947년 9월 25일 미군정청내 법무실이 이미 검토했다며, 영친왕이 일본황제의 조카와 결혼했기 때문에 일본국적법 736조에 의거, 일본국적자로 간주되며 한국법상으로도 한국국적자는 아니라고 정리했습니다. 영친왕의 한국내 재산에 대해서도 미군정청측은 영친왕 개인의 재산이 아닌 한국정부 소유라는 명쾌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 대한민국 조약 1호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조협정’이 담긴 1949년 1월 19일자 대한민국 관보.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INITIAL FINANCIAL AND PROPERTY SETTLEMENT OF 1948)은 대한민국 조약 1호로 1948년 9월 11일 대한민국 대표 이범석, 장택상과 미국 대표 존 무초 간에 체결됐습니다. 일주일뒤인 9월 18일 국회비준을 얻은 뒤 이듬해인 1949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 명의로 공포됐고 다음날인 1월 19일자 관보에 4페이지 분량으로 게재됐었습니다.
당시 미국이 사용중인 서울 시내 주요 호텔등 12건의 부동산에 대해 ‘임시무상차용’을 허용하는 등 협상과정에서 숱은 갈등을 낳았던 이 협정의 제1조에는 '미국 정부는 좌기 재산에 대하여 미국이 보유하였던 일체의 권리, 명의와 이익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함’이라고 규정돼 있으며 이에 따라 영친왕의 재산은 한국 정부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한국대표부 역시 영친왕의 재산에 대해 한국법은 한국내 재산에 대해서만 결정할 수 있으며 일본내 재산소유권문제는 1948년 10월 12일 세발드가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에서 제안한 대로 한국과 일본정부에서 이 문제를 해결토록 기다려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일본내 재산에 대한 결정은 유보하고 한·일 양국에 이를 맡기자고 건의한 것입니다.
이 전문들에서 알 수 있듯이 영친왕 이은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가능하다면 일본내 재산을 처분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했습니다. 그가 미국 유학을 시키려던 차남 이구는 미국으로 건너가 MIT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영친왕은 아들 졸업식 참석차 미국을 방문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정치권의 반대 등으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 이민까지 고려했던 영친왕 이은은 5·16 혁명뒤인 1962년 12월에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해방 18년만인 1963년 11월 박정희 전대통령의 주선으로 늦게나마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귀국, 고국에서 7년여를 살다 1970년 5월 1일 한많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또 그의 아들 이구씨는 MIT졸업뒤 미국내 최고의 건축설계회사인 아이엠 페이에서 건축사로 일했습니다. 아이엠페이는 1993년 김영삼 정부때 미국물리학회의 건물을 사들여 신축한 뉴욕의 현 한국유엔대표부 건물을 설계한 회사입니다. 마지막 황세손으로 불리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는 2005년 일본 아카스카 프린스호텔 별관, 즉 영친왕의 일본 자택이었다가 참의원 의장공관으로 사용됐으며 마침내 호텔로 변해버린 그 ‘한많은 저택’에 투숙했다 운명하게 됩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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