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전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입력 : 2013.10.11 10:48 | 수정 : 2013.10.12 10:07
- 지난 3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의 정상회담.
미국과 일본이 지난 10월 3일 도쿄에서 만나, 고개를 들고 있는 중국을 겨냥해 “동맹체제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겠다”고 천명했다. 양국의 외무·국방장관들이 합의한 것이다. 발표는 “미·일동맹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코너스톤(모퉁이돌)”이라 하고 있다. ‘모퉁이돌’이라면 쉽게 감이 오지 않는데, ‘주춧돌’이 더 가까울 것이다. 여하튼 미국은 중국에 맞서 힘의 축족(軸足)을 일본 위에 두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고는 그들 자신의 헌법에 막혀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 있던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바뀌는 조치도 미국은 지지하고 나왔다.
일본의 아베 신조 자민당 정권은 이른바 ‘해석개헌’으로 집단자위권을 행사하는 전쟁국가가 되겠다고 한 것이다. 미국은 이번에 일본에 전쟁국가의 문을 열어 줬다. 맥아더 점령군 사령관의 평화헌법 이래 66년 만이다. 미국은 이 같은 결정의 배경으로 오는 2020년까지 방위비 1조달러(약 1076조원)를 줄여야 하는 재정난과 신흥 중국의 대두를 들고 있다. 이 결정의 파장은, 예단컨대 미국의 베트남 파병 결정의 파장과 그 귀결에 맞먹을 수 있다. 당시 초강국 미국에 정글의 이데올로기 국가 베트민(越盟·월남독립동맹)이 계산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인들의 민족주의를 알지 못했다.
일본은 독일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 국가다. 일본은 독일과는 달리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전범국가, 즉 ‘도덕적 결손국가’다. 일본은 미국과는 이런저런 것을 했는지 모르지만, 아시아의 나라들과는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다. 2차대전 후 아시아의 나라들은 일본의 국제적 역할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던 것을 미국이 예사로 봐서는 안 된다. 문제는 한마디로 세계평화의 관리자인 미국이 요새 와서 힘 좀 부친다고 도덕적 결손국가인 일본을 빚진 아시아의 결정적 파트너로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 평화의 관리자 자리를 내놓는 일이 닥칠 것이다. 미국의 퇴세는 오히려 앞당겨질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 전쟁을 하지 않는 한 미국은 늘 일본에 휘둘렸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세계사의 중요한 전기에 일본하고만 부딪히면 역사적 오판을 했다. 미국 대통령으로는 드물게 보는 제국주의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재임 1901~1909)는 뉴욕주지사로 부통령 후보였던 1900년 8월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가 될 것이고, 여태까지의 행동거지로 보건대 그렇게 할 만하다. 그러나 중국을 분할하는 것 같은 일이 없도록 진정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친구인 유럽의 한 외교관에게 했던 말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인 1905년, 미국은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밀약’으로 러일전쟁(1904~1905)에 이긴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하여 깔고 앉는 것을 세계에 앞서 인정해 주었다. 만주벌판에서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세가 달려가던 일본을 승전의 모양을 갖춰 강화테이블에 앉게 해준 것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고속으로 개명한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가도록 문을 열어준 미국의 대통령이다.
루스벨트가 걱정했던 ‘중국의 분할’은 그로부터 30년 뒤인 1931년 9월 일본 군부의 만주 침략으로 현실화되었고 그것이 태평양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나고서 유럽은 국제연맹조직 등 ‘베르사유 체제’로서 전후 평화를 달성했지만, 연맹 가입에 실패했던 최강의 전승국 미국은 태평양의 평화와 중국의 주권적 현상유지를 위해 영국·프랑스·일본 등 주요국들을 미국에 불러 이른바 ‘워싱턴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때 미국은 1차대전을 거치면서 감지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주의적 침략기를 손보았던 것이다. 미·영·일이 함께 해군 군축을 했고, 일본의 제국주의화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던 영일동맹을 해체했고, 일본이 독일을 밀어내고 차지했던 중국 산동반도의 칭다오(靑島)를 토해내게 했지만, 한국만 일본 식민지로 그대로 두었다. 그러고서 마음 좋은 미국은 일본을 믿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 워런 하딩(재임 1921~1923)은 문제를 남겼다. 2년 전의 3·1운동(1919)과 상하이임시정부의 열망을 딛고 선 이승만 등의 한국 독립청원을 워싱턴회의에서 외면했다. 전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의 선언이 있었어도, 하딩은 한국 사람들을 민족 단위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한국이 일본제국의 일부임을 전 세계에 과시해 보인 것이 워싱턴 체제였다. 하딩 대통령은 일본이 한국 땅을 만주 및 중국 침략의 기지로 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자원과 시장을 미국에 기대는 ‘삼류 제국주의’ 일본에, 하딩 대통령이 한 것은 말하자면 ‘봉’ 노릇이다. 미국에 1929년 대공황이 오자, 일본제국은 미련 없이 워싱턴 체제를 깨고, 1931년 전 만주를 석 달 만에 석권해 버리지 않았던가.
역사는 얄궂게도 팽창주의적 일본 제국에 온실을 제공한 워싱턴 체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그 초입에서 한번 크게 신호를 보냈다. 워싱턴회의 다음해인 1923년 9월 일본에는 관동대지진이 있었다. 이 재난 속에서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 전역에서 일본 관민은 합세하여 조선 사람을 가려내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6600여명을 잔혹하고도 처참하게 학살했다.
이를 현지에서 견문하고 겪은 사이러스 우즈(Cyrus Woods) 주일 미국대사(재임 1923~1924)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이와 같은 가공할 (조선인) 대학살이 백주에 공공연히 벌어진 일본이란 나라는 단언코 문명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 특히 그짓을 예사로 보고, 보면서도 저지하려 들지 않은 일본 정부는 온 세계에서도 제일 야만의 정부다.”(長田彰文 ‘世界史の中の近代日韓関係’·2013) 미국 당국은 이 신호를 또 놓쳤다. 경고를 놓친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피하지 못했다.
인류사에 제국주의의 종식과 식민지 해방을 가져온 위대한 자유의 전사,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 히틀러의 패망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도 보지 못하고 1945년 4월 12일 눈을 감았다. 예상도 준비도 못한 채로 갑자기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재임 1945~1953)이 전무후무한 지구 규모 대전쟁의 문맥을 장악하기는 어려웠을 수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 일제의 무조건 항복을 받았어도, 태평양전쟁의 제일 최고 책임자인 쇼와 텐노(昭和天皇·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면제하고 말았다. 천황 없는 일본 점령통치의 비용을 두려워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루스벨트가 눈감지 않았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편의주의적 타협을 승자 미국이 저질렀다고, 사가(史家)들은 말한다. 그 인과(因果)는 제국 일본의 최대의 죄과라 할 아시아 침략의 과거를 청산할 기회를 일본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일이다. 승자 미국이 패자 일본의 윤리적 재생의 길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오늘날 한·중·일 동아시아 3국 사이에 ‘역사인식’이 문제가 되고 있는 연원은 승자 미국의 어설픈 전후처리에 닿아 있다. 미국이 청교도의 후예다운 메시아주의로 윤리감 없는 파트너를 공짜 안보로 감싸주고 시장까지 열어준 결과는 가혹했다. 텐노제국의 신도들은 강성해진 경제력으로 군사공격하듯 폭포수 같은 무역 공세를 펼쳐 세계를 리드하던 미국의 제조업 기반을 내려앉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 경제가 세계 정상에 도달했던 1980년대의 일이다. 20세기의 로마제국인 미국에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단초는 이렇게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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