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紙 28세 인턴기자, 사흘간 서울 신림동 일대서 폐지 수거 체험해 보니…]
- 끄~응, 꿈쩍도 안하네
리어카 무게만 해도
50㎏
폐지 싣고는 갈지자 행보
내리막도 중심 잡느라 식은땀
할머니 왈 "내가 한다니께"
- "푼돈이라도 그게
어디여"
하루 3회 부지런히 왕복해도 밥값 빼면 만원도 안 남아
"이사집 보는 날엔 대박이제… 비 오는 날? 운수 나쁜
날"
- 이것도 돈 된다고… 경쟁 치열
소형 트럭·오토바이 타고 폐지 물량 싹쓸이하는 젊은이들 늘어 걱정거리로
"힘든 노인들
어찌 살라고…"
'끄~응.'
리어카 손잡이를 쥔 양손에 힘을 주었다. 폐지가 가득 실린 리어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옆에 선 할머니가 슬며시 웃었다. 이번엔 고개를 숙이고
체중을 앞으로 옮긴 채 오른발과 양손에 동시에 젖 먹던 힘을 다했다. 악다문 입에선 신음 소리가 나왔다. 리어카가 갈지자로 조금씩 나아갔다.
대로로 나서니 달리는 버스와 승용차가 무서웠다. 얼마 못 가 얼굴은 시뻘게졌고 땀으로 범벅이 됐다. "그러게 내가 한다니께." 할머니 보기가
민망했지만 그만 손잡이를 넘겨줘야 했다.
- 폐지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고단한 삶이어도 노인들의 마음은 따뜻했다. 최근 사흘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서 폐지 수거 동행 취재를 한 본지 김광훈(오른쪽) 인턴기자에게 '폐지 할아버지'가 리어카 끄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지난달 26일 오전 9시 신림9동(대학동)의 한 고물상.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피부 거친 노인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일부 노인들은 가게에서 소주를 사왔다. 영하 8도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한 모금씩 들이켰다. 남은 소주 반병은 가게에 보관했다. 몸이 풀린 노인부터 밤새 고물상에 세워둔 리어카 상태를 확인하고 골목길로 사라졌다.
"젊은이는 힘들어서 못할 건데, 괜찮겠어?" 하는, 앞니가 빠져 웃을 때마다 친근해 보이는 박모(64)씨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는 45년째 신림동에 살고 있다. 젊었을 때 막노동을 해 신림동 건물의 절반이 자기 손을 거쳤을 것이라고 한다. 작은 옷가게를 하는 부인과 남매를 둔 그는 수년 전 중국 동포가 들어오면서 일감이 끊기고 고물상을 찾게 됐다.
"에이 젠장, 아침부터…." 편의점 옆에서 빈 상자를 해체하던 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상자 사이에 숨어있던 음료수와 가래에 목장갑이 흠뻑 젖었던 것. 장갑을 벗은 그는 맨손으로 리어카를 끌었다. 10분이 안 돼 그의 손등은 시뻘게졌다. 기자가 리어카를 끌겠다고 하자 박씨가 정색을 했다. "리어카는 내가 끌 거야. (승용차에) 기스라도 내면 큰일 나. 전에 미끄러져서 차랑 살짝 부딪쳤는데 3만원 물어줬어." 이번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 데다 추운 날이 많아 빙판길을 가다 그도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고 한다.
이 일대에는 동마다 고물상이 한 군데씩 있는데 그곳을 거점으로 각각 노인 20여명이 폐지 수거 활동을 한다. 담당 구역은 정해져 있지 않아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다.
박씨의 '사업장'인 신림9동은 원룸·수퍼마켓·음식점·카페·서점·복사집이 이어지는 골목이 수십 개 있다. 길이 꺾이는 곳마다 쓰레기가 쌓여 있고 그 속에 폐지가 있다. 상자를 주우면 일단 안에 있는 내용물을 털어낸 다음 테이프를 뜯고 해체한 뒤 리어카에 싣는 작업을 반복한다. 대형 마트 한두 군데는 주인에게 부탁해 폐지를 독점한다. 박씨는 "아파서 하루 쉬었더니 마트 점장이 자꾸 빠지면 다른 사람한테 상자를 넘기겠다고 하는 바람에 되도록 매일 나와야 한다"고 했다.
두 시간 동안 골목을 돌아다니며 원룸 네 곳과 수퍼마켓 두 곳에서 상자 무더기를 발견했다. 박씨는 어딜 가면 '대박'을 터뜨리는지 미리 알고 있는 듯했다. '폐지뿐 아니라 빈병·고물도 모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박씨는 "작업 시간이 오래 걸려 결국 손해"라고 했다. 안 주워본 게 없는 듯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리어카 끄는 자에겐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모두 고생길이었다. 오르막길을 만나면 한숨이 절로 나왔고 내리막길에선 무게를 못 이기면 리어카에 깔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낮 12시. 작업 3시간 만에 리어카에 폐지가 한가득 실렸다. 다시 고물상으로 돌아왔다. 리어카를 바닥 저울에 올리니 110㎏이 나왔다. 폐지를 내려놓고 리어카 무게를 재니 50㎏이었다. 순수한 폐지 물량은 60㎏. 고물상 주인은 ㎏당 100원씩 모두 6000원을 내줬다. 이렇게 하루 3회 왕복하면 1만8000원을 벌 수 있지만 날이 궂은날에는 두 번 왕복이 어렵다. 그의 평균 일당은 1만2000~1만8000원인 셈이다. 그래도 박씨는 "나야 아직 기운이 좋아 이 정도 벌지만 나이 많은 노인들은 하루 육칠천원 벌기도 힘들다"고 했다.
- "나는 비 오는 날이 제일 싫어. 종이무게만 많이 나가고, 제값을 못 받거든."길거리에서 모은 폐지를 고물상에 넘기면서 할아버지가 말했다. / 이준헌 기자
이날은 박씨에게 '운수 좋은 날'이었다. 동네 아줌마로부터 이삿짐을 날라달라는 '부업'을 부탁받았기 때문. 오후 2시 30분 약속 장소로 가는 골목길에서 주인 없는 리어카에 폐지 한 무더기가 실려있는 것을 보고 '저거는요' 하고 묻자 그는 "양심은 팔지 말아야제" 했다.
박씨는 이사하는 집에서 30여분간 잔짐을 정리해주고 1만5000원을 받았다. 그는 "오늘 정말 많이 벌었다"며 맛있게 담배 한 대를 피웠다. 하지만 이날도 담뱃값과 소주값, 자판기 커피값, 밥값을 제하면 집에 가져갈 돈은 1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박씨는 "늦둥이 대학생 딸이 '커피 한 잔 값이 5000원'이라면서 아침에 1만원을 가져갔다"며 "어제는 7000원밖에 벌지 못했다"고 했다.
박씨는 그래도 이 업계의 강자(强者)에 속한다. 할아버지들은 나이가 들어도 예전에 노동하던 사람이 많아 체력이 좋은 편이지만 할머니들은 그렇지 못하다. 최대 200㎏까지 실을 수 있는 리어카 대신 할머니들은 기껏해야 30㎏을 운반하는 손수레를 끌고 다닌다. 하루 세 번 고물상을 왕복한다 해도 9000원 벌면 많이 버는 것이다.
일부 할머니는 할아버지들과 폐지 수거 경쟁에서 밀리자 건물 주변 청소를 해주고 주인으로부터 '폐지 독점권'을 따내는가 하면 자기가 아는 비밀 장소에 폐지를 모아 두었다가 양이 차면 한 번에 운반한다.
이튿날 만난 설모(85) 할머니가 그랬다. 후미진 골목 안에서 상자를 주섬주섬 챙겨 나오다 기자와 만난 할머니는 "힘없는 할매들은 이렇게라도 모아야 된다"면서 "고혈압으로 날이 추우면 밖에 오래 나와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7남매를 둔 할머니는 자식들 형편이 넉넉지 못한 데다 집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 수년 전부터 폐지 수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요즘 폐지 노인들에겐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폐지나 고물을 대량으로 팔면 수익이 제법 된다는 사실을 알고 젊은이들이 소형 트럭이나 오토바이를 이용해 골목길을 누비며 물량을 싹쓸이해간다는 것이다. 설 할머니는 "젊은 아저씨들이 너무 많아졌어. 개조한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것을 죄다 가져가고 있어"라고 했다. 경쟁이 심해지는 건 폐지 수거 업계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날 오후 한 고시학원에서 '횡재'를 하고도 발을 동동 구르는 할머니를 만났다. 학원이 이사를 해서 종이가 엄청 나왔는데 급한 대로 싣고 보니 혼자 힘으론 도저히 끌고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력 사흘째인 기자는 평소 걸음 10분 거리를 30분이 걸려 고물상까지 리어카를 끌고 갔다. 폐지만 170㎏으로 1만7000원을 손에 쥔 할머니는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고 바삐 사라졌다. 돌아오는 길 점퍼 주머니엔 언제 넣었는지 모를 5000원짜리가 있었다. 기자는 이후 사흘간 몸살을 앓았고 할머니가 준 돈으로 근육 진통제를 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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