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근 읽은 책 중에 장기려 박사님과 관련된 책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부산사람으로서 그리고 병원에 근무를 하는 사람으로서 장기려 박사님을 몰랐던건 아닙니다. 하지만 책을 통해 장박사님에 헌신적인 삶을 세세하게 들여보고난 후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
부산에 위치한 장기려 박사님의 소박한 생가
부산시 서구 아미동 송도해수욕장 근처에는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건물이 있습니다. 복음병원 본관 7층에는 옥탑방으로 올라갈 수 있는 좁디 좁은 계단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성산 장기려 박사님이 사셨던 생가입니다. 부산 의료인들에게는 정신적 뿌리이기도 하신 훌륭한 분이 이토록 소박하게 사셨다니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계단을 따라 현관문 앞에 서면 "장기려"라는 문패가 달려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윽고 감동이 밀려옵니다. 20평정도의 옥탑방안에는 그야말로 무소유로 한평생을 살다가신 장기려 박사님의 삶을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책상 하나와 침대하나가 전부인 살림살이와 장박사님이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많은 책과 장박사님의 옷, 타이, 하다못해 로션까지 놓여져 있어 마치 장박사님이 살아계신듯 느낄수 있습니다.
▲ 부산 고신대학교 본관 7층 옥탑방에 위치한 성산 장기려 박사의 생가
청년의사 장기려 "평생 가난한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신 성산 장기려 박사님은 독립정신을 가르친 의성학교를 설립한 부친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조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의사의 꿈을 품고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의대의 모태)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지원은 했지만 당시 조선인을 1/3밖에 뽑지 않았던 경성의학전문학교였기에 합격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지원후에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 제가 의사가 되면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있는 의사가 되겠습니다." 하늘도 그 마음을 아셨는지 이윽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합격하게 되고 입학후에는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셨던 백인제 선생님의 제자가 됩니다. 또한 1932년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구요.
이후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진료를 보며 주말이면 자전거에 왕진가방과 약품을 챙겨 시골과 산속의 동네를 찾아 가난한 이웃들을 진료하셨습니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아내와 5남매와 헤어져 아들 한명만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 됩니다.
▲ 성산 장기려 박사의 침대 머리맡에는 젊은 아내의 모습과 훗날 80대 아내의 모습을 담은 두 장의 사진이 놓여있다. 그는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않고 재혼하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평생 혼자 지냈다.
피난터 부산에서 피운 봉사와 희생의 진료
피난 후 장기려 박사님은 부산 육군병원에서 전쟁환자들을 최선을 다해 진료하셨지만 의사와 병원이 부족하여 많은 환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만 했습니다. 그때 마침 미국 유학 중 귀국한 전영창님(거창고등학교 설립자)과 한상동 목사님과 함께 구호병원 설립의 뜻을 모으고 부산 영도에 창고를 빌려 무료진료소인 복음진료소(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모태)를 세웠습니다.
당시 천막으로 진료소 세 동을 지은 후 사과상자를 모아 수술대를 만들고 전기가 모자란 당시라 수술을 할때면 촛불을 켜서 수술을 하였습니다. 선교회에서 받은 500불이 운영비의 전부였던 무료진료소에는 40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직원들을 위해 월급을 직원에 딸린 식구수대로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식구가 2명이었던 장기려 박사님은 제일 작게 월급을 타 간거죠.
▲ 무료 천막병원에서 밤낮없이 진료로 봉사했던 장기려 박사와 직원들
"여보시오, 그냥 도망가시오. 가장인데 집에가서 일해야 할 것 아니오."
또한 장기려 박사님은 환자의 진료비 전액을 자신의 그 작은 월급으로 대신 지불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장기려 박사님의 월급은 항상 모자라게 되었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운영마저 어려워지자 병원 진료부장회의에서 앞으로 무료환자에 대한 모든 것은 원장님 임의로 못하고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진정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 장기려 박사님은 어려운 환자가 나타나면 야반도주를 시켜주었습니다. 치료는 끝났지만 치료비가 없어 걱정하던 사람에게 "여보시오. 그냥 도망가시오. 우리병원 어디에 울타리가 있습니까? 그냥 뒷문으로 나가시오. 가장인데 어서 가서 일을 해야 할 것 아니오."라고 뒷문을 열어주곤 했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가난한 환자들을 돌본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40년째 전신마비로 누워있는 이동기씨(74)의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이 계시던 복음병원에 왔을때 7년간이나 무료로 입원시켜주고 오갈데 없는 그에게 직접 집을 지어 주며 30년을 한결 같이 도와 준것입니다. 한편 "나의 소명이 의사이듯이 당신도 그런 몸으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소명이지 않겠는가?"라는 장기려 박사님의 말을 듣고 감동한 이동기씨는 이윽고 누워서라도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이후 시인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의료보험의 효시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장기려 박사님에게 점차 불우한 이웃들의 건강을 지키고자 뜻을 가진 분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장박사님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4명이 뜻을 모아 1968년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낯설었지만 " 건강할때 이웃돕고, 병났을때 도움받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알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2년동안 22만명이 의료보험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1979년에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도 간질환자를 위한 "장미회", 지역사회 복지를 위한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생명의 전화, 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를 설립하시는 등 끊임없이 사회복지사업을 추진하시며 어려운 이웃을 돌봤습니다.
간연구의 개척자 그리고 스승으로서의 삶
2006년 장기려 박사님의 이름은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간연구에 미친 공적이 인정되었기 때문인데 우리나라에서 간연구에 개척자로 불리게 된 이유는 1943년 평양에 있을때 이미 간암환자의 간 일부를 떼어내는데 성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1959년에는 국내 최초로 간의 대량 절제수술에 성공하여 간외과 발전에 큰 획을 긋게 됩니다. 이어 간암에 대한 연구로 1961년에는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였습니다.의사와 함께 장기려 박사님은 제자를 가르치는데도 열정과 사명감을 발휘하셨는데 우리말로 된 의학서적이 거의 없었던 당시 손수 외국책을 번역하여 교재로 만드셨고 고신대 뿐만 아니라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에서도 강의를 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 장기려 박사는 돈이 없는 사람을 치료할 때 자신의 피를 대신 주기도 했다. 또한 병원 뒷문을 열어주며 몰래 돈이없는 환자를 야반도주시킨일도 있다.
지금도 많은 의사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또한 장기려 박사님을 진료의 모델로 삼으시곤 합니다. 진정한 의사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장 그만두고 은둔형 외톨이된 30대女… 생활苦에 지치자 내내 굶은 채 고독사 (0) | 2012.12.08 |
---|---|
장기려 선생의 일대기 (0) | 2012.11.26 |
[상례] 고 장기려 박사 장례식 조사 (여운학 규장문화사 대표) (0) | 2012.11.26 |
참무소유- 가난한 채 세상을 떠난 바보의사 장기려 박사 (0) | 2012.11.26 |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장기려 박사의 아름다운 삶 (1911-1995) (0) | 2012.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