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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탈북자의 북녘추억

[북녘추억①] 중국TV를 막아라, 무소불위의 전파감시소

chosun.com은 탈북자들이 쓰는 ‘북녘 추억’을 부정기 연재합니다. 최근에 북한을 떠나온 이들이 회고하는 북녁 얘기를 통해 북한의 실상에 대한 이해를 더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편집자 주)

내가 태어난 곳은 백두산 자락의 양강도 혜산이다. 이곳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장백조선족 자치현과 맞닿은 최북단 국경지대다. 중국쪽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 하면 한강을 사이에 둔 서울의 강북과 강남쯤의 거리를 연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압록강이라고는 하지만 상류여서 작은 개울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경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을 때여서 아무 때나 왔다갔다 하곤 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이쪽이나 그쪽이나 다를 게 없다보니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은 일변했다. 중국의 개혁ㆍ개방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면서 이곳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하루게 다르게 나아지고, 국경을 통해 남한의 비약적인 발전상이 전해지면서 젊은이들의 관심이 온통 중국으로 쏠리게 된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남한 TV방송의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휴전선 근처 전방지역에 설치돼 있던 전파감시소가 북-중 국경지대에도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TV보급이 확산되고, 이에따라 TV수신탑이 곳곳에 설치되면서 국경에 인접한 북한쪽에서 중국TV 시청이 가능하게 되었다. 중국말로 하는 방송이긴 하지만 뉴스보도 때는 남한 소식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남한의 드라마도 이따금씩 소개됐으며, 연변 방송도 편성돼 있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중국TV를 보려고 야단이었다.

국경 도시에 전파감시소가 등장하면서 혜산에도 전파감시소가 설치돼 나는 이곳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전파감시소의 역할은 국경지대에 만연하고 있는 중국TV 시청을 막는 것이었다. 전파감시소는 중앙체신소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데 1990년대 초 「27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양강도 전파감시소는 소장과 15명의 감독원, 6명의 감시원으로 구성됐다. 혜산시는 물론 도내의 10개 군을 모두 감시하게 된다. 도당 선전부에서 직접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웬만한 지위에 있는 간부라도 감시소 직원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노동자 신분에 완장을 차고보니 갑자기 천하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날 도(道)당 간부들의 집이 밀집돼 있는 탑성동 일대를 맡아 순찰을 돌게 됐다. 도당 부부장의 집 문을 두드리고 전파감시소에서 나왔다고 밝힌 뒤 다짜고짜 들어갔다. 마침 TV가 켜져 있었고, 어린 아들이 정신없이 TV에 몰입해 있었다. 확인해 보니 보고 있던 것은 중국TV에 나오는 일본만화였다.

현장을 들킨 부부장의 부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남편이 알면 집에서 쫓겨난다』며 손이야 발이야 빌기 시작했다. 동행한 여직원에게는 스카프와 사탕과자를, 나에게는 「량강주」 등 고급 술을 몇병 꺼내놓으며 눈감아 달라고 매달렸다. 살다보니 참 별일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콧대 높은 간부집 부인이 살려달라고 애걸하지 않나, 뇌물을 바치질 않나. 간부집이라 계속 추궁해봐야 좋을게 없을테고, 나중에 보복이 있을 수도 있다 싶어 못이기는 척 넘어갔다.

하루는 다른 간부집을 급습했는데 그날은 간부들이 모여 불고기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 인민들은 배급이 끊기기 시작해 아우성인데 이럴 수 있나 분노가 치밀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전파감시소에서 나왔다고 하자 다짜고짜 술상 곁으로 끌어앉히며 「후래3배」를 들게 한뒤 『먹으면서 일하라』며 막무가내였다. 괜히 「혁명성」을 발휘해 분위기를 망쳐봐야 득 될게 없을 것같아 감히 그들과 어울려 함께 술을 마셨다. 술파티가 끝나고 TV를 보니 이미 손을 썼는지 채널이 고정돼 있었다.

TV를 가진 집치고 중국TV 안 보는 집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인데 다 단속할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다. 그러자니 힘없고 운 나쁜 집들이 걸려들어 TV를 몰수 당하고 경을 치게 될 뿐이다. 몰수한 TV는 경제현장에서 실적을 쌓은 공로자나 전사자 가족들에게 무상으로 넘겨졌다.

혜산시내 TV보유율은 평양 다음으로 높았다. 중국과의 밀매가 성행하고, 국경이 가까워 비교적 싼 값에 중국산 전자제품들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TV를 보는 재미에 너도나도 TV구입에 열을 올렸다. 북한 TV방송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지금도 국경지대에서는 전파감시소 요원들이 가정집을 급습해 TV채널을 확인하는 놀음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파감시소 요원이었던 나 자신부터 중국TV 마니아였다. 술과 담배 등 쏟아지는 뇌물을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러니 무슨 효과가 있으랴.

북한의 국경지역은 「해방지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중국TV를 통해 중국의 변화상과 한국의 발전상, 세계정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 사람이 도둑 한 명을 막을 수 없다』는 옛 속담이 있다. 북한당국이 갖은 수단을 동원해 주민들의 눈과 귀를 막으려고 해보지만 다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박영학· 전 양강도 혜산시 전파감시소 감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