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테너 박인수 백석대 석좌교수
“음악은 들어 즐겁기에 존재하는 것… 고귀함, 높낮음이 없다.”
‘향수’는 좋은 시이고 좋은 노래입니다. 당시에도 좋아서 녹음을 했을 뿐,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적, 문학적, 음악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朴忍洙
⊙ 1938년 서울 출생.
⊙ 경동고, 서울대 음악대학 졸업. 美 뉴욕 줄리아드 음대, 맨해튼음악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 서울대 음대 성악과 교수 역임. 現 백석대 음악대학원 석좌교수 겸 대학원장.
⊙ 오페라 라보엠, 리골레토, 사랑의 묘약, 토스카, 돈파스콸레 등 주역으로 활동.
대중가요 ‘향수’ 취입.
⊙ 한국방송대상 성악가상 수상(1991년, 1994년).
朴忍洙
⊙ 1938년 서울 출생.
⊙ 경동고, 서울대 음악대학 졸업. 美 뉴욕 줄리아드 음대, 맨해튼음악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 서울대 음대 성악과 교수 역임. 現 백석대 음악대학원 석좌교수 겸 대학원장.
⊙ 오페라 라보엠, 리골레토, 사랑의 묘약, 토스카, 돈파스콸레 등 주역으로 활동.
대중가요 ‘향수’ 취입.
⊙ 한국방송대상 성악가상 수상(1991년, 1994년).
국립오페라단 차기 단장으로 거론됐던 이 베테랑 성악가는 하루아침에 오페라단에서 제명(除名)을 당했다. 대중가수와 듀엣곡을 불러 음반을 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앨범은 발매한 지 7개월 만에 70만 장이나 팔렸다. 대중은 환호했지만, 성악가는 업계의 싸늘한 시선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테너 성악가 박인수(朴忍洙) 교수다. 그는 가수 이동원씨와 함께 ‘향수’를 불러 업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정지용씨의 시(詩)에 김희갑씨가 곡을 붙인 ‘향수’는 1989년 5월에 대중가요로 부활했다.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노(老)교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지난 1월 7일, 서울대 성악과 교수를 정년 퇴직하고 현재 백석대 음악대학원 석좌교수로 있는 박인수 교수를 만났다. 두툼한 점퍼에 멋스런 모직 모자를 눌러쓴 그는 일흔을 넘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어 보였다. ‘건강은 괜찮으시냐’고 묻자 “요즘도 일 년에 70여 차례 공연을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박 교수의 나지막한 저음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목소리 톤이다.
―‘향수’를 부른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성악가가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이 파격이었는데, 후회한 적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향수’는 좋은 시이고 좋은 노래입니다. 당시에도 좋아서 녹음을 했을 뿐,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적, 문학적, 음악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람의 고정관념은 참 무섭죠. 클래식은 대중음악과 다르다는 고정관념이 거셌고, 제가 이에 위배되는 일을 했기 때문에 파문의 중심에 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비난했던 사람들을 이해합니다. 너무 파격이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거죠. 개인적으로 ‘향수’를 부르고 나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성악가로서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고, 사람들의 인생을 다양하게 이해하게 됐습니다.”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한 것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인데요.
“음반이 나온 다음에 저를 제외한 단원 13명이 투표를 했더군요. 제명 찬성이 10 표였다고 합니다. 단원에 대한 징계, 제재 권한이 문화관광부에 있어서 일이 커질 뻔했습니다.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저를 지지하면서 국립오페라단 해체론까지 불거졌는데, 다행히 수습됐습니다. 나중에 몇몇이 찾아와 ‘분위기에 휩쓸려 투표했는데, 잘못된 일 같다’면서 미안해하더군요.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죠. 종교나 다른 분야였다면 쫓겨난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놨어야 할 테니까요.”
앨범 130만 장… 연어 한마리 받아
―후배들이 이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볼 때 느낌이 남다르시겠군요.
“참 많이 달라졌다 싶기는 합니다. ‘향수’가 이런 변화를 가져온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합니다.”
‘향수’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눈은 촉촉해졌다. 벌써 십 년이 넘은 일이지만, 그는 음반을 취입하게 된 과정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향수’를 부르게 된 계기는 1989년 초 어느 날, 가수 이동원씨가 집에 찾아와서였다.
“‘시를 한 번 읽어보세요. 혹시 곡이 붙여지면 저하고 노래 안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더군요. 이동원씨완 친분도 있지 않았고, 정지용 시인도 알지 못했습니다. 무심코 책장을 넘겼는데 느낌이 강렬하게 왔습니다. ‘이 시는 국민의 시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서울 사람인데, 시에서 ‘고향’의 느낌이 강하게 전달되는 겁니다. ‘곡만 좋다면 오케이’라고 답했습니다.”
두 달 뒤, 이씨는 김희갑씨가 곡을 붙인 대중가요 ‘향수’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희갑씨는 이미 다섯 달 전부터 이 시에 곡을 붙이고 있었다고 한다.
“노래가 마음에 딱 들었습니다. 이틀 뒤에 바로 녹음했죠. 클래식 성악가가 대중가수랑 음반을 내니까, 좀 시끄러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하고, 파문이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시가 좋고, 또 시에 붙여진 곡이 좋으니까, 노래를 부르자고 생각해 녹음했습니다.”
―노래가 나오자마자 히트를 했죠.
“네. 그해 연말까지 70만 장이 팔렸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현재까지 앨범이 총 130만 장 팔렸다고 합니다. 베스트셀러죠.”
―인세를 꽤 많이 받으셨겠네요.
“인세는 무슨. 노래를 녹음하면서 계약을 안 했는데 무슨 돈을 받습니까. 인세가 총 13억원이라고 들었는데, 10원 한 푼 안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습니까.
“향수 노래가 나오고, 연말에 이동원씨가 길쭉한 상자 하나를 들고 집에 찾아왔더라고요. 그때까지 인세가 7억원 들어왔는데 그동안 본인이 진 빚을 갚고, 작은 집도 한 칸 마련하느라 돈을 썼다는 겁니다. ‘잘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동원씨가 ‘이제부터 들어오는 인세는 주겠다’고 했는데, 감감 무소식입니다. 길쭉한 상자 안에 용돈이라도 조금 넣어왔나 싶어 열어 보니, 연어 한 마리가 있지 뭡니까(웃음).”
―아무리 그래도 인세를 한 푼도 안 받은 게 억울하지 않으세요.
“빚 갚는 데 썼다는데 뭐라고 합니까. 제가 원래 셈이 좀 약합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입니다. 인세는 받지 못했지만, 유명해졌잖습니까. 제가 ‘향수’를 부르지 않았다면 대중에게 성악가가 이처럼 잘 알려질 수 있었겠습니까. ‘향수’ 덕분에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바람에 공연 수익이 늘었습니다. 오페라 가수만으로 활동하며 올릴 수 없는 수입이죠. 잃고, 얻는 것은 자로 잰 듯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박인수 교수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진심으로 ‘향수’라는 노래에 대해 감사해 한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모차르트 베토벤도 당대엔 대중음악가
―그래도 ‘향수’는 여전히 대중가요이지요.
“형식이 다르고, 격식이 다르고 그런 거지, 음악 자체에 무슨 경계가 있습니까. 본질은 같은 겁니다. 연주가들이 사용하는 창법과 주법이 다른 것뿐이지요. 음악에는 아래위가 없습니다.”
―클래식은 고상한 것, 대중가요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시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이 클래식을 망하게 하는 겁니다. 클래식이 오늘날처럼 급속히 쇠퇴기에 진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 등이 만든 클래식 음악도 당대엔 대중음악이었습니다. 왕이나 제후들이 그들을 고용해서 연회장에서, 배 위에서 연주를 한 겁니다. 그것이 클래식 음악의 역사입니다. 대중음악을 깔보고, 단순하다고 치부하는 것이 클래식을 망하게 하는 길입니다. 멸망의 지름길은 교만입니다. 음악은 사람들이 듣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장르에 따른 고귀함, 높낮음이 있을 수 없죠.”
음악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참 자유로웠다. 몇 마디를 나누기 전부터 그가 보헤미안 기질이 다분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이 와 닿았다. 박 교수는 스스로를 ‘영혼의 방랑자’라고 표현했다. 어찌 보면 그에게 ‘향수’라는 노래는 파격이 아니라, 그의 삶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서울시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초등학교 때는 서울 세검정 일대에서 자두, 배 등 과일을 좌판에서 팔았고, 중학교 때는 경기도 수원에서 조선일보 신문배달을 하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물건을 얻어 팔았다.
어린 시절의 꿈은 마도로스였다. 경동고등학교를 다닐 때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음악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학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단다.
계란 다섯꾸러미로 성악 레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중구청에서 임시 공무원을 했던 그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처음 성악가를 꿈꿨다. 하지만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터라, 제대로 된 성악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무작정 이우근 당시 이화예고(현 서울예고) 선생을 찾아가 레슨을 해달라고 졸랐다. 이 선생은 어린 제자를 받아줬고, 그는 석 달 동안 그에게서 성악 레슨을 받았다. 레슨비는 계란 다섯 꾸러미. 사실상 ‘공짜 수업’이었다.
하지만 재능이 특출했던 그는 몇 달 뒤에 서울대 음악대학 성악과 시험을 통과, 59학번이 됐다. 대학을 진학했지만, 1, 2학년 때 출석률은 낮았다.
“막상 가보니 음악 하는 남자들이 남자같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운동하고, 강한 남자들이 남성스럽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고나 할까요. 정이 붙지 않아서 1, 2학년 때는 아예 학교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음악을 하겠다고 해놓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 나가는 것은 고사하더라도 노래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하지만 이도 잠시, 그는 군(軍)에 입대했고 제대한 뒤 학교를 휴학했다. 박 교수는 “노래하는 사람이 굳이 대학을 졸업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고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는 휴학 5년 동안 동생과 같이 분식집, 포장마차 등을 하고, 혼자서 노래 연구를 했다. 마냥 이어진 방랑 생활이었다.
“제가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부분이 좀 있습니다. 그냥 그때는 그런 일이 하고 싶더라고요. 혼자 소리 연구하고, 득음(得音)하려고 애쓰고 지냈습니다. 먹고살자고 시작한 식당은 전부 말아먹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나라는 사람은 노래하는 것 말고는 재주가 없더라고요.”
그에게 첫 번째 기회가 찾아온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국립오페라단의 ‘마틴의 사수’ 주역으로 발탁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암담했다. 그에게 혹평이 쏟아졌다. 주위 사람들이 ‘성악은 안되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 교수는 첫 공연의 실패를 가슴에 안고, 1968년 가을에 대학을 졸업했다. 입학한 지 꼭 10년 만이었다. 그는 다시 오페라에 도전했다. 친척 아저씨인 월탄 박종화 선생에게 부탁해 언론사에 공연을 홍보했다. 그는 1969년, 서울오페라단이 만든 ‘라보엠’의 주역을 맡아 성공리에 공연을 마쳤다.
하지만 이 공연은 그에게 재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미국 버펄로음악대학의 한 교수가 공연 녹음테이프를 듣고, 그에게 미국으로 올 것을 제안한 것이다. 버펄로대학은 오페라 ‘파우스트’를 준비 중이었는데, 박 교수를 주인공으로 낙점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공연은 어디까지나 일회성에 불과했다.
“한 번 공연해 달라는 제안이었지만 곧장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한 번이 두 번으로 이어지고, 또 장기적으로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안고 말입니다.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 않아 유학을 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였는데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단 한 번의 기회가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뉴욕에서 프리랜서 성악가로 활동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버펄로음악대학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는 학교 측으로부터 장학금과 생활비를 보조받고 미국에 남게 됐다. 이듬해에는 명문대인 뉴욕 줄리아드 음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칼라스 장학생 오디션’에 참가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오페라 ‘라보엠’의 주역으로 뽑혔다. 오늘날 세계적인 테너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닐 시코프(Neil Schicoff)가 박 교수와 함께 더블 캐스팅으로 선발됐다.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 와서 마리아칼라스에게 인정받는 가수가 되어, 오페라 주역으로 발탁됐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 일이더군요.”
줄리아드 대학의 지휘자가 바뀌었고, 그와 닐 시코프 모두 주역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는 학교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학교 측은 난처해 했지만, 지휘자의 의견을 존중했다. 박인수 교수는 줄리아드 음대를 그만두고 맨해튼 음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후 맨해튼 음대 석사과정 학생으로서 라보엠, 리골레토, 토스카, 돈파스콸레 등 대다수 오페라의 주역을 맡았다. 공부는 뒷전이고, 연주하기를 즐겼던 그는 맨해튼 음대 총장의 권유로 프로페셔널 성악가가 됐다. 다행히도 그는 인기가 좋았다.
“미국은 신흥국가이다 보니 유럽에 콤플렉스가 많았고, 유럽의 문화를 돈을 주고 사오는 일이 잦았습니다. 제가 활동했던 당시에도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오페라 가수들에게 높은 개런티를 지급했고, 최고의 성악가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공연 문화는 달랐습니다. 독일의 성악가들은 특정 극단에 소속되어 활동하지만, 뉴욕은 철저하게 프리랜서로 활동합니다. 실력이 없는 사람은 매일 놀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성악가 중에 웨이터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박인수 교수는 다행스럽게도 인기가 좋아, 뉴욕뿐 아니라 미국 전역, 캐나다, 남미지방에까지 공연을 다녔다. 공연 수입도 짭짤했다. 그는 한 번 공연할 때 1000달러 정도를 받았다. 남미에서 두어 달쯤 공연을 하면, 체재비 이외에 5000달러 정도를 만졌다. 박 교수의 가족이 1980년대 초반에 연간 5만 달러 정도를 생활비로 지출했다고 하니, 그의 공연 수입을 짐작할 수 있다.
20년 동안 음대 교수로 재직
박인수 교수는 1983년, 모교(母校)인 서울대에서 제안한 음대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미국 생활을 한 지 13년 만에 그는 귀국했다.
“서울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즐거웠고, 스스로 무대 체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소질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몇 번 고심을 한 끝에 결국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결정적 계기가 있었나요.
“참 우스운 얘기인데, 자장면하고 설렁탕이 먹고 싶었습니다(웃음). 남들에게는 웃긴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진심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미국 생활을 하다 보니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먹을 기회가 적었거든요. 한국에 돌아가도 노래는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고, 설렁탕은 원 없이 먹을 것 같아서 들어왔죠(웃음).”
서울대 교수로서 월급은 본봉 45만원에 체력단련비 등을 합쳐 100만원 정도. 연봉으로 환산하자면, 미국 벌이보다 훨씬 적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의 모든 기억을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와 2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9년에 그의 ‘향수’앨범이 나왔을 때, 학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단다. 그의 제자인 김성준 백석대 교수의 얘기다.
“‘향수’가 나왔을 때 학부생이었는데, 교수님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업계에서는 ‘클래식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지나친 파격이다’며 교수님을 지탄했지만,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이 얼마나 잘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나 할까요. 이전에도 학생들 사이에서 자유분방한 교수로 인기가 좋았지만, ‘향수’를 취입한 이후에 지지하는 학생들이 훨씬 늘었죠.”
실제로 박 교수의 제자사랑은 각별하다. 그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던 지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월급을 집에 가져간 적이 없단다.
박 교수의 얘기다.
“제자들 7~8명이랑 매일 밥 먹고, 가끔 용돈을 주느라 한 번도 월급을 가져다준 적이 없습니다. 사실 운수 좋으면 공연료가 월급보다 많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와이프 월급도 있었고요. 뭐, 어쨌든 이런 방랑자를 묵묵하게 지지해 준 집사람이 대단하지요(웃음).”
박인수 교수의 부인은 한세대 교수로 있는 안희복씨다. 소프라노 성악가인 안 교수는 남편과 함께 호암아트홀에서 ‘부부리사이틀’을 열기도 했다. 외아들 박상준씨는 현재 미국 뉴욕에서 프리랜서 플루트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공연 잘 안될 땐 술 한 잔이 위로돼
박인수 교수는 1990~2000년까지 전국을 돌며, 총 2000회 이상 공연을 했다. 그의 전공인 오페라 ‘라보엠’의 주역만 100번 이상을 맡았다. 서울, 대구, 부산 등에서 저녁 공연을 하고 새벽에 올라와, 오전에 학교에서 강의하고, 다시 공연 가는 생활을 20여 년째 반복하고 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얼마나 좋기에. 박 교수의 얘기다.
“무대에 오르는 것이 보람 있지요. 당연히 그렇지. 노래가 잘됐을 때, 관객의 박수 갈채를 받을 때는 마음이 설렙니다. 하지만 죽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노래가 잘 안됐을 때에는 스스로에 대한 절망감으로 많이 괴롭습니다. 커튼콜이 내려지면 허전하니까 술 한 잔 하고…. 쓸쓸함을 달래기 위한 술 한 잔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어떤 때에는 헷갈리기도 해요. 술을 마시려고 공연을 한 건가, 공연을 한 허전함으로 술을 마시는 건가 헷갈려(웃음).”
―성악가가 되기 위한 좋은 목소리는 타고나는 겁니까.
“타고나기도 하고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성악가들의 목소리를 보는 경향이 많은데, 예전 사람들은 음악적 감성이나 센스가 있는 사람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목소리보다 예술에 대한 열정, 그 감각을 보는 겁니다. 성악을 하는 테크닉은 가르치고 배워서 해결이 되는데, 감성은 그게 안되는 겁니다.”
―음대 가려면 돈을 싸들고 다녀야 된다는 소리를 흔히 하는데요.
“우리나라의 독특한 풍속이라고 봅니다. 국민들에게 있는 쏠림현상이죠. 레슨비가 가장 비싼 곳이 우리나라일 겁니다. 미국 줄리아드 음대의 최고 교수가 1회에 20만원 정도를 받을 겁니다. 보통 교수들은 그보다 저렴하고요. 성악을 하려는 사람이 많고, 그만큼 선생은 풍족하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겠지요. 하지만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 성악 레슨비를 내지 못해 음악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그건 기성세대들이 도와줘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박 교수는 지금 10여 명의 대학생, 대학강사들에게 무료로 개인 레슨을 해 주고 있다.
―성악한 것을 후회했던 적은 없습니까.
“다시 태어나도 하지. 당연히. 그것밖에 재주가 없으니까.”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장벽을 깬 주인공으로서 소회를 밝힌다면요.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음악의 경계를 짓는 후배들에게 ‘혼자 벽 보고 음악을 할 거냐’고 묻습니다. 음악이란 사람들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겁니다. 본인이 해서 즐겁고, 남들이 들어서 즐거운 음악을 해야 합니다. 음악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철학이 생깁니다. 절망에 빠져도 진짜 절망에 빠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에요. 방방 뛰게 좋은 것도 오래가지 않고, 죽고 싶은 절망도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고, 또 반대이고. 그게 음악이고, 인생이죠.”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중략)>
인터뷰를 끝낸 뒤, 십 년 전 흥얼거렸던 ‘향수’를 다시 들어봤다. 첫 구절이 인터뷰 내내 푸근한 웃음을 보인 그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테너 성악가 박인수(朴忍洙) 교수다. 그는 가수 이동원씨와 함께 ‘향수’를 불러 업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정지용씨의 시(詩)에 김희갑씨가 곡을 붙인 ‘향수’는 1989년 5월에 대중가요로 부활했다.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노(老)교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지난 1월 7일, 서울대 성악과 교수를 정년 퇴직하고 현재 백석대 음악대학원 석좌교수로 있는 박인수 교수를 만났다. 두툼한 점퍼에 멋스런 모직 모자를 눌러쓴 그는 일흔을 넘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어 보였다. ‘건강은 괜찮으시냐’고 묻자 “요즘도 일 년에 70여 차례 공연을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테너는 보통 예순을 전후해 공연을 그만둔다는데 저는 아직 괜찮습니다. 성악가들이 발성법을 잘 조절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연주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무대에 올라야죠.”
박 교수의 나지막한 저음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목소리 톤이다.
―‘향수’를 부른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성악가가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이 파격이었는데, 후회한 적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향수’는 좋은 시이고 좋은 노래입니다. 당시에도 좋아서 녹음을 했을 뿐,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적, 문학적, 음악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람의 고정관념은 참 무섭죠. 클래식은 대중음악과 다르다는 고정관념이 거셌고, 제가 이에 위배되는 일을 했기 때문에 파문의 중심에 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비난했던 사람들을 이해합니다. 너무 파격이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거죠. 개인적으로 ‘향수’를 부르고 나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성악가로서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고, 사람들의 인생을 다양하게 이해하게 됐습니다.”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한 것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인데요.
앨범 130만 장… 연어 한마리 받아
―후배들이 이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볼 때 느낌이 남다르시겠군요.
“참 많이 달라졌다 싶기는 합니다. ‘향수’가 이런 변화를 가져온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합니다.”
‘향수’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눈은 촉촉해졌다. 벌써 십 년이 넘은 일이지만, 그는 음반을 취입하게 된 과정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향수’를 부르게 된 계기는 1989년 초 어느 날, 가수 이동원씨가 집에 찾아와서였다.
“‘시를 한 번 읽어보세요. 혹시 곡이 붙여지면 저하고 노래 안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더군요. 이동원씨완 친분도 있지 않았고, 정지용 시인도 알지 못했습니다. 무심코 책장을 넘겼는데 느낌이 강렬하게 왔습니다. ‘이 시는 국민의 시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서울 사람인데, 시에서 ‘고향’의 느낌이 강하게 전달되는 겁니다. ‘곡만 좋다면 오케이’라고 답했습니다.”
두 달 뒤, 이씨는 김희갑씨가 곡을 붙인 대중가요 ‘향수’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희갑씨는 이미 다섯 달 전부터 이 시에 곡을 붙이고 있었다고 한다.
“노래가 마음에 딱 들었습니다. 이틀 뒤에 바로 녹음했죠. 클래식 성악가가 대중가수랑 음반을 내니까, 좀 시끄러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하고, 파문이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시가 좋고, 또 시에 붙여진 곡이 좋으니까, 노래를 부르자고 생각해 녹음했습니다.”
―노래가 나오자마자 히트를 했죠.
“네. 그해 연말까지 70만 장이 팔렸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현재까지 앨범이 총 130만 장 팔렸다고 합니다. 베스트셀러죠.”
―인세를 꽤 많이 받으셨겠네요.
“인세는 무슨. 노래를 녹음하면서 계약을 안 했는데 무슨 돈을 받습니까. 인세가 총 13억원이라고 들었는데, 10원 한 푼 안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습니까.
“향수 노래가 나오고, 연말에 이동원씨가 길쭉한 상자 하나를 들고 집에 찾아왔더라고요. 그때까지 인세가 7억원 들어왔는데 그동안 본인이 진 빚을 갚고, 작은 집도 한 칸 마련하느라 돈을 썼다는 겁니다. ‘잘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동원씨가 ‘이제부터 들어오는 인세는 주겠다’고 했는데, 감감 무소식입니다. 길쭉한 상자 안에 용돈이라도 조금 넣어왔나 싶어 열어 보니, 연어 한 마리가 있지 뭡니까(웃음).”
―아무리 그래도 인세를 한 푼도 안 받은 게 억울하지 않으세요.
“빚 갚는 데 썼다는데 뭐라고 합니까. 제가 원래 셈이 좀 약합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입니다. 인세는 받지 못했지만, 유명해졌잖습니까. 제가 ‘향수’를 부르지 않았다면 대중에게 성악가가 이처럼 잘 알려질 수 있었겠습니까. ‘향수’ 덕분에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바람에 공연 수익이 늘었습니다. 오페라 가수만으로 활동하며 올릴 수 없는 수입이죠. 잃고, 얻는 것은 자로 잰 듯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박인수 교수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진심으로 ‘향수’라는 노래에 대해 감사해 한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모차르트 베토벤도 당대엔 대중음악가
―그래도 ‘향수’는 여전히 대중가요이지요.
“형식이 다르고, 격식이 다르고 그런 거지, 음악 자체에 무슨 경계가 있습니까. 본질은 같은 겁니다. 연주가들이 사용하는 창법과 주법이 다른 것뿐이지요. 음악에는 아래위가 없습니다.”
―클래식은 고상한 것, 대중가요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시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이 클래식을 망하게 하는 겁니다. 클래식이 오늘날처럼 급속히 쇠퇴기에 진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 등이 만든 클래식 음악도 당대엔 대중음악이었습니다. 왕이나 제후들이 그들을 고용해서 연회장에서, 배 위에서 연주를 한 겁니다. 그것이 클래식 음악의 역사입니다. 대중음악을 깔보고, 단순하다고 치부하는 것이 클래식을 망하게 하는 길입니다. 멸망의 지름길은 교만입니다. 음악은 사람들이 듣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장르에 따른 고귀함, 높낮음이 있을 수 없죠.”
음악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참 자유로웠다. 몇 마디를 나누기 전부터 그가 보헤미안 기질이 다분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이 와 닿았다. 박 교수는 스스로를 ‘영혼의 방랑자’라고 표현했다. 어찌 보면 그에게 ‘향수’라는 노래는 파격이 아니라, 그의 삶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서울시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초등학교 때는 서울 세검정 일대에서 자두, 배 등 과일을 좌판에서 팔았고, 중학교 때는 경기도 수원에서 조선일보 신문배달을 하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물건을 얻어 팔았다.
어린 시절의 꿈은 마도로스였다. 경동고등학교를 다닐 때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음악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학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단다.
계란 다섯꾸러미로 성악 레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중구청에서 임시 공무원을 했던 그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처음 성악가를 꿈꿨다. 하지만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터라, 제대로 된 성악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무작정 이우근 당시 이화예고(현 서울예고) 선생을 찾아가 레슨을 해달라고 졸랐다. 이 선생은 어린 제자를 받아줬고, 그는 석 달 동안 그에게서 성악 레슨을 받았다. 레슨비는 계란 다섯 꾸러미. 사실상 ‘공짜 수업’이었다.
하지만 재능이 특출했던 그는 몇 달 뒤에 서울대 음악대학 성악과 시험을 통과, 59학번이 됐다. 대학을 진학했지만, 1, 2학년 때 출석률은 낮았다.
“막상 가보니 음악 하는 남자들이 남자같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운동하고, 강한 남자들이 남성스럽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고나 할까요. 정이 붙지 않아서 1, 2학년 때는 아예 학교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음악을 하겠다고 해놓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 나가는 것은 고사하더라도 노래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하지만 이도 잠시, 그는 군(軍)에 입대했고 제대한 뒤 학교를 휴학했다. 박 교수는 “노래하는 사람이 굳이 대학을 졸업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고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는 휴학 5년 동안 동생과 같이 분식집, 포장마차 등을 하고, 혼자서 노래 연구를 했다. 마냥 이어진 방랑 생활이었다.
“제가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부분이 좀 있습니다. 그냥 그때는 그런 일이 하고 싶더라고요. 혼자 소리 연구하고, 득음(得音)하려고 애쓰고 지냈습니다. 먹고살자고 시작한 식당은 전부 말아먹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나라는 사람은 노래하는 것 말고는 재주가 없더라고요.”
그에게 첫 번째 기회가 찾아온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국립오페라단의 ‘마틴의 사수’ 주역으로 발탁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암담했다. 그에게 혹평이 쏟아졌다. 주위 사람들이 ‘성악은 안되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 교수는 첫 공연의 실패를 가슴에 안고, 1968년 가을에 대학을 졸업했다. 입학한 지 꼭 10년 만이었다. 그는 다시 오페라에 도전했다. 친척 아저씨인 월탄 박종화 선생에게 부탁해 언론사에 공연을 홍보했다. 그는 1969년, 서울오페라단이 만든 ‘라보엠’의 주역을 맡아 성공리에 공연을 마쳤다.
하지만 이 공연은 그에게 재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미국 버펄로음악대학의 한 교수가 공연 녹음테이프를 듣고, 그에게 미국으로 올 것을 제안한 것이다. 버펄로대학은 오페라 ‘파우스트’를 준비 중이었는데, 박 교수를 주인공으로 낙점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공연은 어디까지나 일회성에 불과했다.
“한 번 공연해 달라는 제안이었지만 곧장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한 번이 두 번으로 이어지고, 또 장기적으로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안고 말입니다.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 않아 유학을 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였는데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단 한 번의 기회가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버펄로음악대학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는 학교 측으로부터 장학금과 생활비를 보조받고 미국에 남게 됐다. 이듬해에는 명문대인 뉴욕 줄리아드 음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칼라스 장학생 오디션’에 참가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오페라 ‘라보엠’의 주역으로 뽑혔다. 오늘날 세계적인 테너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닐 시코프(Neil Schicoff)가 박 교수와 함께 더블 캐스팅으로 선발됐다.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 와서 마리아칼라스에게 인정받는 가수가 되어, 오페라 주역으로 발탁됐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 일이더군요.”
줄리아드 대학의 지휘자가 바뀌었고, 그와 닐 시코프 모두 주역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는 학교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학교 측은 난처해 했지만, 지휘자의 의견을 존중했다. 박인수 교수는 줄리아드 음대를 그만두고 맨해튼 음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후 맨해튼 음대 석사과정 학생으로서 라보엠, 리골레토, 토스카, 돈파스콸레 등 대다수 오페라의 주역을 맡았다. 공부는 뒷전이고, 연주하기를 즐겼던 그는 맨해튼 음대 총장의 권유로 프로페셔널 성악가가 됐다. 다행히도 그는 인기가 좋았다.
“미국은 신흥국가이다 보니 유럽에 콤플렉스가 많았고, 유럽의 문화를 돈을 주고 사오는 일이 잦았습니다. 제가 활동했던 당시에도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오페라 가수들에게 높은 개런티를 지급했고, 최고의 성악가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공연 문화는 달랐습니다. 독일의 성악가들은 특정 극단에 소속되어 활동하지만, 뉴욕은 철저하게 프리랜서로 활동합니다. 실력이 없는 사람은 매일 놀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성악가 중에 웨이터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박인수 교수는 다행스럽게도 인기가 좋아, 뉴욕뿐 아니라 미국 전역, 캐나다, 남미지방에까지 공연을 다녔다. 공연 수입도 짭짤했다. 그는 한 번 공연할 때 1000달러 정도를 받았다. 남미에서 두어 달쯤 공연을 하면, 체재비 이외에 5000달러 정도를 만졌다. 박 교수의 가족이 1980년대 초반에 연간 5만 달러 정도를 생활비로 지출했다고 하니, 그의 공연 수입을 짐작할 수 있다.
20년 동안 음대 교수로 재직
박인수 교수는 1983년, 모교(母校)인 서울대에서 제안한 음대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미국 생활을 한 지 13년 만에 그는 귀국했다.
“서울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즐거웠고, 스스로 무대 체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소질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몇 번 고심을 한 끝에 결국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결정적 계기가 있었나요.
“참 우스운 얘기인데, 자장면하고 설렁탕이 먹고 싶었습니다(웃음). 남들에게는 웃긴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진심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미국 생활을 하다 보니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먹을 기회가 적었거든요. 한국에 돌아가도 노래는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고, 설렁탕은 원 없이 먹을 것 같아서 들어왔죠(웃음).”
서울대 교수로서 월급은 본봉 45만원에 체력단련비 등을 합쳐 100만원 정도. 연봉으로 환산하자면, 미국 벌이보다 훨씬 적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의 모든 기억을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와 2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9년에 그의 ‘향수’앨범이 나왔을 때, 학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단다. 그의 제자인 김성준 백석대 교수의 얘기다.
“‘향수’가 나왔을 때 학부생이었는데, 교수님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업계에서는 ‘클래식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지나친 파격이다’며 교수님을 지탄했지만,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이 얼마나 잘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나 할까요. 이전에도 학생들 사이에서 자유분방한 교수로 인기가 좋았지만, ‘향수’를 취입한 이후에 지지하는 학생들이 훨씬 늘었죠.”
실제로 박 교수의 제자사랑은 각별하다. 그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던 지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월급을 집에 가져간 적이 없단다.
박 교수의 얘기다.
“제자들 7~8명이랑 매일 밥 먹고, 가끔 용돈을 주느라 한 번도 월급을 가져다준 적이 없습니다. 사실 운수 좋으면 공연료가 월급보다 많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와이프 월급도 있었고요. 뭐, 어쨌든 이런 방랑자를 묵묵하게 지지해 준 집사람이 대단하지요(웃음).”
박인수 교수의 부인은 한세대 교수로 있는 안희복씨다. 소프라노 성악가인 안 교수는 남편과 함께 호암아트홀에서 ‘부부리사이틀’을 열기도 했다. 외아들 박상준씨는 현재 미국 뉴욕에서 프리랜서 플루트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박인수 교수는 1990~2000년까지 전국을 돌며, 총 2000회 이상 공연을 했다. 그의 전공인 오페라 ‘라보엠’의 주역만 100번 이상을 맡았다. 서울, 대구, 부산 등에서 저녁 공연을 하고 새벽에 올라와, 오전에 학교에서 강의하고, 다시 공연 가는 생활을 20여 년째 반복하고 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얼마나 좋기에. 박 교수의 얘기다.
“무대에 오르는 것이 보람 있지요. 당연히 그렇지. 노래가 잘됐을 때, 관객의 박수 갈채를 받을 때는 마음이 설렙니다. 하지만 죽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노래가 잘 안됐을 때에는 스스로에 대한 절망감으로 많이 괴롭습니다. 커튼콜이 내려지면 허전하니까 술 한 잔 하고…. 쓸쓸함을 달래기 위한 술 한 잔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어떤 때에는 헷갈리기도 해요. 술을 마시려고 공연을 한 건가, 공연을 한 허전함으로 술을 마시는 건가 헷갈려(웃음).”
―성악가가 되기 위한 좋은 목소리는 타고나는 겁니까.
“타고나기도 하고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성악가들의 목소리를 보는 경향이 많은데, 예전 사람들은 음악적 감성이나 센스가 있는 사람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목소리보다 예술에 대한 열정, 그 감각을 보는 겁니다. 성악을 하는 테크닉은 가르치고 배워서 해결이 되는데, 감성은 그게 안되는 겁니다.”
―음대 가려면 돈을 싸들고 다녀야 된다는 소리를 흔히 하는데요.
“우리나라의 독특한 풍속이라고 봅니다. 국민들에게 있는 쏠림현상이죠. 레슨비가 가장 비싼 곳이 우리나라일 겁니다. 미국 줄리아드 음대의 최고 교수가 1회에 20만원 정도를 받을 겁니다. 보통 교수들은 그보다 저렴하고요. 성악을 하려는 사람이 많고, 그만큼 선생은 풍족하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겠지요. 하지만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 성악 레슨비를 내지 못해 음악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그건 기성세대들이 도와줘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박 교수는 지금 10여 명의 대학생, 대학강사들에게 무료로 개인 레슨을 해 주고 있다.
―성악한 것을 후회했던 적은 없습니까.
“다시 태어나도 하지. 당연히. 그것밖에 재주가 없으니까.”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장벽을 깬 주인공으로서 소회를 밝힌다면요.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음악의 경계를 짓는 후배들에게 ‘혼자 벽 보고 음악을 할 거냐’고 묻습니다. 음악이란 사람들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겁니다. 본인이 해서 즐겁고, 남들이 들어서 즐거운 음악을 해야 합니다. 음악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철학이 생깁니다. 절망에 빠져도 진짜 절망에 빠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에요. 방방 뛰게 좋은 것도 오래가지 않고, 죽고 싶은 절망도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고, 또 반대이고. 그게 음악이고, 인생이죠.”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중략)>
인터뷰를 끝낸 뒤, 십 년 전 흥얼거렸던 ‘향수’를 다시 들어봤다. 첫 구절이 인터뷰 내내 푸근한 웃음을 보인 그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혀진 계절 (이용) (0) | 2021.11.02 |
---|---|
너와나 (0) | 2021.06.30 |
대학가요제 이정희 - 그대 생각 (0) | 2021.06.30 |
South Korean Patriotic Song - "Ode to the Fatherland" (조국찬가) (0) | 2021.06.30 |
조용필 - 단발머리 (1980) (0) | 2021.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