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1.11.05 03:00
국가별 반도체 생산 점유율 변화 및 전망/게티이미지뱅크,그래픽=김의균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은 생산 설비 증설과 첨단 메모리 연구·개발 등에 향후 10년간 1500억달러(약 175조원)를 투자하겠다고 지난달 21일 발표했다. 메모리 반도체 D램 시장에서 점유율 20%대로 3위를 하고 있는 마이크론이 선두 추격을 목표로 대규모 투자에 나선 것이다. D램 분야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는 한국 삼성전자, 2위는 SK하이닉스다.
메모리·비(非)메모리·소재·장비 등을 모두 합쳐 총 4733억달러(약 557조원·지난해 기준)에 달하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은 50.8% 점유율을 가진 세계 1위 국가다. 하지만 CPU(중앙처리장치), GPU(그래픽처리장치), 모바일 AP 등 고부가 가치 시스템 반도체 설계에만 주력하고 생산은 등한시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에 자본력과 외교력을 총동원해 생산 능력을 단번에 끌어올리겠다며 반격을 선언,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를 뒤흔들고 있다.
◇코로나로 약점 드러낸 미국 반도체 산업
미국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반도체 시장 전 분야에서 주도권을 쥔 국가였다. 하지만 제조업 아웃소싱 열풍이 불면서 인건비가 낮은 아시아 지역으로 생산 기반이 옮겨졌다. 그러면서 반도체 설계는 미국의 팹리스(반도체 개발과 설계만 하는 회사)가 하고, 제조는 아시아의 파운드리(위탁 생산 회사)가 하는 분업 체계가 굳어졌다. 설계와 생산을 한꺼번에 하는 종합 반도체 기업(IDM)의 영역인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에서 한국 기업에 밀렸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은 크게 위축됐다. 1990년 유럽(44%)에 이어 37%로 2위였던 생산 점유율 순위는 2020년 12%로 대만(22%), 한국(21%), 중국(15%), 일본(13%)에 밀려 5위로 처졌다. 수요가 폭증해도, 공급에 차질이 생겨도 수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특히 미국의 조바심을 자극한 건 패권 경쟁국 중국이었다.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0%를 달성한다는 목표로 올해만 1250억달러를 설비투자에 쓸 계획이다. 반도체 주요 생산국인 한국과 대만이 중국 코앞에 있다는 사실도 미국의 불안감을 키웠다. 펫 겔싱어 인텔 CEO는 최근 “한국과 대만에 생산을 의존하는 건 지정학적 불안정을 초래한다”고 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안보상 이유를 들어 중국 반도체 회사를 견제하는 한편 자국 반도체 공급망 복원에 착수했다. ‘반도체 진흥법’ ‘미국 파운드리법’ 등을 잇따라 제정했고, 올 4월엔 인프라 개선에 520억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손 뗐던 파운드리에도 대규모 투자
기업들도 대규모 투자로 정부 정책에 화답했다. 지난 3월엔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선언하며 200억달러(약 23조40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대규모 공장 두 개를 신설하는 내용이다. 지난해 7월 반도체 선폭 7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공정 개발에 실패하면서 첨단 반도체 생산 기능이 마비됐다는 평가를 받은 지 1년도 안 돼 재정비를 마치고 전장에 돌아온 것이다. 업계에선 자금력과 기존 시장에서의 지위를 감안했을 때 인텔이 파운드리 분야에서 압도적 1위인 대만 TSMC, 2위 삼성전자와 함께 조만간 3강 체제를 구축할 것으로 전망한다. 지난 7월 세계 최대 통신 반도체 제조사 퀄컴, 온라인 유통 공룡 아마존과 차세대 칩 생산을 계약하며 파운드리 재진입의 포문을 열었다.
파운드리 분야 3~4위를 오가는 미국 글로벌파운드리(GF)도 가세했다. 최근 뉴욕 증시에 상장하며 260억달러 기업 가치를 인정받아 26억달러 실탄을 확보했다. 이런 자금력을 바탕으로 신규 공장에 14억달러를 투자하고, 내년엔 투자액을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GF는 일단 TSMC나 삼성이 장악한 하이엔드 반도체 대신 자동차 반도체 등 틈새 시장에 주력할 것으로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인텔과 GF가 TSMC와 삼성전자를 협공하는 형태가 될 전망이다.
◇반도체 석권할까, 일본 전철 밟을까
하지만 미국의 의도대로 순조롭게 생산 능력을 확대한다고 해도 글로벌 수요를 얼마나 흡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TSMC와 삼성전자는 현재 5나노 공정으로 양산 중이지만, 인텔은 10나노에 머물러 있다. 인텔은 2024년 2나노급 기술을 확보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TSMC와 삼성전자는 이미 최초 3나노 양산을 두고 경쟁 중이다. 인텔로서는 4년 안에 두 단계 이상 격차를 뛰어넘어야 비로소 경쟁에 뛰어들 수 있다. 성공한다면 미국 기업을 중심으로 고객을 늘려 판을 뒤집을 수도 있지만, 실패한다면 2000년대 일본 반도체 회사들이 그랬듯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도 있다.
역내에 반도체 공급망을 재구축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그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글로벌 반도체 분업 시스템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미국이 완전한 반도체 공급망을 재구축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수천억달러를 들여도 공급망은 여전히 불완전할 것이며, 비용도 현재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반도체 시장이 계속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어느 한 기업이 독점하기보다 참여 기업들이 나눠 갖게 될 파이 자체가 커질 가능성이 크다”며 “우리 기업들도 손을 놓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시장점유율에 극적인 변화가 생기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기업들의 전방위적인 투자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당장 큰 위협이 되진 않을 것이란 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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