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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 "처음부터 보수는 실패했다. '진짜 보수'가 없었다"
류순열 / 기사승인 : 2020-01-01 08:24:11
[2020 새로운 10년을 말하다] ① 경제학자 조순
"국민의 질, 지도자의 질 높아지지 않으면 10년 지나도 달라질 게 없다"
▲ 경제석학 조순은 매일 아침 파이낸셜타임스를 읽는다. 함께 보던 중국 인민일보는 언젠가부터 배달이 끊겼다. 인터뷰하러 간 기자에게 "받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묻는다. 아흔을 넘기고도 그렇게,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1928년 2월1일생, 한달 뒤면 만 아흔둘이다. [정병혁 기자]
대담=류순열 편집국장
서울대 교수,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초대 민선 서울시장, 한나라당 총재….
경제학자 조순(91)의 이력이다. 정·관·학계를 아우르는 광폭 스펙이다. 이름 뒤에 어떤 직함을 붙여야 할까.
"교수라고 해주세요. 원래 교수였으니."
2019년을 하루 남겨둔 30일 오후 서울 관악구 행운동 조 전 교수의 자택을 찾았다.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의자에서 일어설 땐 양손에 지팡이가 쥐여졌다. 그렇다고 건강에 큰 이상이 있는 건 아닌 듯 했다. 혈색, 발음, 언변에서 그 연령대의 연로한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조 전 교수는 1928년 2월1일생, 한달 뒤면 만 92세가 된다.
시대 흐름을 읽고, 천하를 내다보는 일은 원로학자 조순의 숙명인가. 요즘도 그는 매일 아침 파이낸셜타임스를 읽는다고 했다. 다만, 함께 보던 중국 인민일보는 요즘 보지 못한다. 언젠가부터 배달이 뚝 끊겼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할 만한 일이다. 요즘 세상에 종이신문, 그것도 인민일보를 배달받아 보는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종이신문의 시대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2020년, 새로운 10년을 여는 첫해. 새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구순의 학자는 거꾸로 걱정을 토로했다. 정치도, 경제도, 남북관계도 그의 전망은 어두웠다. 당장 해빙무드였던 북미관계는 어느새 과거로 회귀하고, 새해 초 북한의 도발 가능성마저 고개를 든 터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전만 해도 조 전 교수는 "북한은 달라질 것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갈 것"이라며 낙관했었다. 그러나 이젠 "트럼프도 잘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결국 김정은의 책임이다. 남한 사람들도 속은 거다"라며 낙관론을 버렸다.
조 전 교수는 "남한도,북한도 희망이 없다. 실행하고 서로 믿도록 해야 하는데 우린 그걸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통일이라는 게 결국 서로의 신뢰에서 생기는 건데, 이래서 무슨 통일이 되겠냐"는 거다.
조 전 교수는 "결국 김정은이 성의를 보여야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야지"라고 콕 집어 말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핵을 포기하고 '빅딜'하라는 얘기다.
한국의 경제 침체와 사회 갈등의 해법으로는 "국민, 특히 지도자와 엘리트의 질"을 말했다. "국민의 질, 특히 지도자의 질이 좋아져야 사회가, 나라가 달라진다"는 설명이다.
조 전 교수는 "그게 안되면 10년이 가도 나아질 게 없다"면서 "지도자의 질이 썩 좋았던 때가 별로 없는데, 특히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이 시대에 와서 많이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특히 조 전 교수는 이 대목에서 보수의 책임을 강조했다. "보수가 나라의 중심을 잡는 법인데, 그런 일을 하는 진짜 보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 전 교수는 "우리는 처음부터 보수가 실패했다. 보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 조순 전 서울대 교수가 2019년을 하루 남겨둔 12월 30일 오후 서울 행운동 자택서 진행한 UPI뉴스와의 인터뷰에서 2020년 한반도 정세를 전망하고 있다. [정병혁 기자]
ㅡ민주주의는 다양성인데, 정치권은 여전히 좌·우, 진보·보수 이분법으로 사회갈등을 부추기지 않나
"양분화도 정직하게 하면 된다. 토론을 한다든지 자유롭게 하면 괜찮다. 상대방이 좋은 게 있으면 양보를 한다든지.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이기려는 의도밖에 없다. 또 우리는 처음부터 보수가 실패했다. 보수가 무엇인가. 그 나라의 중심을 잡는 것이 보수다. 그런데 사사오입 개헌부터 군사정권과 거기에 붙었던 권력들이 보수를 자처하며 생존을 도모하고 커졌다. 이제는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것 밖에 안된다. '내가 정말 이 나라의 중심이다'라는 포부를 가진 보수는 없었다고 본다."
조 전 교수는 "진짜 보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단언했다. 과거 수차례 인터뷰에서도 조 전 교수는 "보수세력이 중심을 잡고 보수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단순히 이념에 사로잡혀 빨갱이 타령이나 하고 있다"고 비판하곤 했다.
ㅡ보수가 처음부터 실패했다는 건 무슨 말인가
"이승만 시대 초기의 경제정책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농지개혁을 했고 인플레도 잡았다. 이승만의 실패는 건국의 공은 세웠지만 소위 '나라 만들기'엔 실패했다는 거다. 나라가 그냥 대한민국 출범, 이걸로 만은 안 된다. 세 가지를 해야 하는데, 첫째는 갈기갈기 찢긴 국론을 통일해 안정시키는 것, 둘째는 정치경제 방향을 제시하는 것, 셋째는 개인의 행동이 후세에 모범을 보여 전통과 관습을 세우는 일이다. 이걸 이승만은 못 했다. 첫째는 이념 투쟁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국론 통일이 어려웠으니 많이 탓할 수는 없는데 둘째, 셋째는 완전히 실패했다.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을 촉발했고 개인 행동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일 만한 일을 하지 못했다. 초대 대통령이 해외로 망명하는 일이 어디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래서 조 전 교수는 해방 이후 70여년을 후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초대 이승만 정권에 대해선 "건국의 공은 있으나 제대로 된 나라 만들기엔 실패했다"고, 박정희 정권에 대해선 "한강의 기적을 이뤄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수출·성장 지상주의, 정경유착 등의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고 평했다. 그 결과 오늘의 한국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균형 잃은 나라'가 돼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한국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가.
"우리 역사를 봐라. 이율곡이 개혁하자고 소리 높여 외쳤는데 임진란(1592년)이 터져 8년간 나라가 뒤집힐 정도로 욕을 봤다. 그런데도 이후 전혀 개혁이 없었다. 그 뒤 병자호란(1636년)을 만났는데 또 전혀 과거를 탈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죽 내려와 나중에 한 것이 갑오개혁(1894년)인데, 이 건 일본인들이 하라고 해서 일본 지휘 아래 진행된 것으로 일본 침략을 돕는 역할을 했다. 그런 역사를 단절해야 하는데 지금 한국은 어떤가. 한국이 제 목소리 내고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게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두려워하는 거다. 강대국 눈치만 보고 제 목소리 못 내고 어디 붙으면 유리할까 생각하는 수준으로는 치욕의 역사를 단절할 수 없다. 그게 조선을 삼키려 강대국이 각축하던 1894년의 상황이다."
조 전 교수는 "자기 힘으로 나라를 세워가고 지켜가려 해야지. 의존하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 2019년 12월30일 오후 서울 관악구 행운동 자택서 UPI뉴스와 인터뷰중인 경제석학 조순. [정병혁 기자]
ㅡ2020년은 새로운 10년을 여는 첫해다. 2020년대 한반도의 운명,어떻게 달라질까.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나라가 좋아지고 나빠지는 것은 그 나라 지도자의 질에 달렸다. 그 주변의 엘리트의 질도 중요하다. 나아가서는 국민들의 질이 좋아져야 그 나라가 좋아지고 새로운 운명이 전개된다. 결국 지도자의 질이 좋아져야 하고 국민들이 행동과 사고를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 그걸 못하면 10년이 지나도 달라질 게 없다."
ㅡ지도자의 질에 문제가 있나
"지도자의 질이 썩 좋았던 때가 별로 없다. 특히 우리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서너 지도자들이다.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등. 견식, 국민 통솔 능력, 이런 것들이 다 부족했다. 이명박의 경우 한반도에 운하를 만들겠다면서 4대강 문제를 들고 나오고, 박근혜는 최순실을 모범으로 삼았다. 말이 안 되는 거다. 문재인 정권도 소득주도성장이라는 희한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
조 전 교수는 2015년말 인터뷰에서는 "세상은 이미 뉴노멀 시대다. 더 이상 고도성장은 없다. 수출만 잘해봐야 이제 별 재미가 없다"면서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강조했었다. 부동산 중심 경기부양책에 대해서도 "장래 안정과 성장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ㅡ100년 전 구한말 때 사대외교를 하다 망국의 길로 갔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구한말 시대에 힘이 없었다. 그런데 힘이라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노력을 안 해서 힘이 없었던 거다. 조선시대에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있었지만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이제는 미·중·러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남을 믿을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어야 한다. 우리 국민의 능력이 부족한가. 아니다. 다 할 수 있는데 안 해서 그렇다."
조 전 교수는 율곡 이이(1536 ~ 1584)의 문장을 즐겨 인용한다. 그중 하나가 "천하의 일은 잘되지 않으면 잘못되고, 나라의 대세는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는 명언이다. 나이 서른에 당대 왕인 명종(재위 1545∼1567)에게 올렸다는 직언으로, 천하는 잘되지 않으면 잘못되는 것이지 중간은 없다는 의미다.
조 전 교수가 440여년 전 조선 중기 석학이자 정치가의 명언을 즐겨 인용하는 것은 현 세대에 보다 넓고 깊은 함의를 전달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율곡이 남긴 명언의 핵심은 "잘되고 잘못되고,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실로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조 전 교수는 "율곡 선생의 말씀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들어맞는 진리"라며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겨냥해 "진정성과 성의를 갖고 대책을 마련하고 국민들이 믿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들에게 정부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 이게 경제 대책이든 뭐든 모든 정책의 첫걸음"이라고, 조 전 교수는 강조했다.
◆ 경제석학 조순은…
"대통령 빼고는 다 해보신 것 아닌가요?" 소리 없는 웃음에 흰 눈썹이 올라갔다.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 초대 민선 서울시장, 한나라당 총재가 과거 그의 삶을 채운 자리들이다.
그러나 그가 "원래 교수"라고 강조하듯 그의 큰 족적은 한국 경제학계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인터뷰에서 그는 경제학자로서의 충고도 잊지 않았다. "작금 경제학이 자꾸만 미시적으로 가고 있어 천하대세를 잘 보지 못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금융위기가 왔을 때 유명한 경제학자들에게 '당신들은 머리도 좋고 공부도 많이 했는데 왜 몰랐느냐'고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큰 흐름을 읽는 경제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쇠퇴하는 인문학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인문학이 죽으면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선악 구별이 안 되고, 가치판단이 안 선다. 인문학을 모른다는 건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리 = 손지혜 기자, 사진 = 정병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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