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2014년 12월
“58년 개띠의 머릿속에는 ‘공간’과 관련한 많은 추억이 있다. 그 공간에는 개발독재, 압축성장의 편린들이 가득하다. 부수고 세우고 무너뜨리고 다시 이어야 했던 현장 속에 58년 개띠들이 단체로 숨어 있다. 그들은 끌어 주는 선배 흔치 않고, 밀어 주는 후배 찾기 어렵던 변화의 시대에 일찍부터 혼자 크는 연습을 했다. 자긍심인지 자존심인지 모를 배포 하나로 말석이나마 자기 공간을 버텨 냈다.”
⊙ 서울의 심장인 종로야말로 문화적 충격의 최전방, 서울의 민낯
⊙ 대구 동성로 ‘동백(동아백화점)’과 ‘대백(대구백화점)’ 사이를 오가며 한 시절 보내
⊙ 광주 금남로는 광주의 동맥… 5·18 이전의 광주는 지금의 광주가 아냐
⊙ 울산 옥교동,‘멋 좀 부릴 줄 아는’ 학생들의 브랜드로 넘쳐나다
바둑 웹툰 ‘미생’을 드라마로 재연한 tvN의 ‘미생’이 직장인 사이에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바둑에서 미생(未生)은 집이나 대마(大馬) 등이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일컫는다. 완전히 죽은 돌인 사석(死石)과 다르다. 미생은 언젠가는 ‘완생(完生)’할 여지가 있는 돌이다. 드라마 ‘미생’의 극중(劇中) 오 과장이 계약직 신입사원 장그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왕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버텨 봐라. 버틴다는 거는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간다는 거니까.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다 아직 미생이야.”
한국사회에서 58년 개띠, 마지막 헝그리 세대들은 은퇴를 했거나 앞둔 경계선에 서 있다. 이들은 여전히 미생일까, 아니면 완생일까. 아직도 완생으로 가고 있을까. 58년 ‘개 같은 인생’들은 무지막지하게 한 시대를 굽이쳐 온 미생 같은 세대임에 틀림없다. 소설가 이문구(李文求)의 표현대로라면, ‘기타 등등 여러분들’이 바로 그들이다.
3부제 콩나물 수업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학교를 다녔고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청춘을 보냈다. 사회인이 되어, 가정보다 회사에 충성하는 ‘회사형 인간’으로 살다가 나이 마흔에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를 겪었다. 40대에 ‘사오정(45세 정년)’, 50대에 ‘오륙도(56세까지 회사 다니면 도둑놈)’ 신세였다.
기쁜 일도 많았다. 유년 시절, 시골에선 여전히 호롱불을 켜고 짚신이나 고무신을 신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안착할 무렵인 1970년대 말 2차 오일쇼크를 겪었지만 80년대 경제 활황으로 나이키, 프로스펙스, 아식스를 알게 됐다. 요즘엔 통가죽 부츠나 발리 골프화에 전혀 어색함이 없다. 짚신에서 골프화까지 문명의 압축적 변화를 모두 목도한 이가 58년 개띠들이다.
컴퓨터엔 半문맹, 어중간한 낀 세대
58년 개띠인 사회학자 전상인 교수(서울대)는 ‘58 개’를 이렇게 규정했다.
“한때 58년 개띠 세대들의 모습은 직장에서도 어중간하기 짝이 없었죠. 조직의 쓴맛에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신세대식 개인의 단맛을 즐길 용기는 없었어요. 칼퇴근하는 젊은 세대들에 서운해하면서도 술자리에서 끝장을 봐야 하는 구세대는 부담스러웠죠. 뽕짝 부를 능력이 이전 세대보다 벅차고, 랩송이나 발라드도 마찬가지인 세대, 컴퓨터에 대해서는 반(半) 문맹. 그러다 보니 동병상련하는 자들의 유유상종은 이 땅의 세대갈등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꼴이 되었어요.”
전 교수는 “싫든 좋은 58년 개띠들은 우리 사회의 세대간 교량”이라며 “설령 강폭은 넓은데 교폭은 좁을지언정 이 교량은 우리 사회가 앓는 성장의 아픔이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해방과 전쟁 세대를 부모로 모신 58년 개띠들은 이승만 정권 말기 출생신고를 하고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동기에 ‘간신히’ 젖을 뗐다. 조국 근대화의 파고(波高)가 밀려 오던 시절, 청소년기를 보냈고 공장노동자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농촌은 무너지고 대가족은 찢어졌다. 이 과정에 아파트라는 공간(주거양식)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베이비부머와 관련이 깊다.
58년 개띠의 머릿속에는 ‘공간’과 관련한 많은 추억이 있다. 그 공간에는 개발독재, 압축성장의 편린들이 가득하다. 부수고 세우고 무너뜨리고 다시 이어야 했던 현장 속에 58년 개띠들이 단체로 숨어 있다. 그들은 끌어 주는 선배 흔치 않고, 밀어 주는 후배 찾기 어렵던 변화의 시대에 일찍부터 혼자 크는 연습을 했다. 자긍심인지 자존심인지 모를 배포 하나로 말석이나마 자기 공간을 버텨 냈다.
한국현대사의 기억은 공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그 공간 속에서 (옛)사람을 만난다. 공간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잊힌 사람을 불러 세우는 맥락이다. 공간은 시간을 되돌려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 그 장소(공간)를 찾게 된다. 기자는 58년 개띠들의 기억을 더듬어 ‘공간’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공간 속에서 한국현대사를 더듬었다.
종로는 서울의 민낯이자 함성의 진원지
서울 출신 58년 개띠들은 모두 종로에 대한 기억이 ‘완강하게’ 남아 있다.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용산구 일대를 ‘강북’이라 말하기보다 ‘종로’라 부르길 더 좋아한다. 강북은 강남에 기부터 꺾이지만 종로는 강남에 주눅 들지 않는다. 다채로운 역사성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PD인 58년 개띠 박승찬씨는 유년의 서울 종로를 재구성(再構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가 나고 자란 종로6가만 하더라도 흥인지문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변했다. 서울의 심장인 종로야말로 문화적 충격의 최전방, 서울의 민낯인지 모른다.
“제가 자란 동대문 이대부속병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금은 공원이 됐습니다. 제가 태어난 한옥 생가는 이화동으로 넘어가는 길이 뚫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요. 동대문 전차 종점 차고가 없어지더니 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섰습니다. 그 터미널마저 강남(반포)으로 떠나고 상가가 생기더니 지금은 뭐가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다니던 학교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초등학교(서울 효제초등) 입학 당시 재학생 수가 7000명이 넘어 3부제 수업까지 하던 학교가 지금은 20여 학급 400여 명에 불과합니다. 등교만 하면 방공방첩을 외쳐 북한을 천하의 원수로 배워 북한 사람은 전부 머리에 뿔난 도깨비로 알고 있었습니다. 잘 먹지도, 씻지도 않고 무릎이 까지고 종기가 나도 ‘아까징끼’ 한 번 바르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종로는 누가 뭐래도 서울의 간판이다. 북악산·인왕산이 있고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사직단·동대문 등 수없이 많은 문화유산이 있고, 고층빌딩을 돌아가면 그 옛날의 골목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며, 명품 한옥과 다 기울어져 가는 한옥이 뒤섞여 있는 곳이 종로다.
그러나 시대가 필요로 하는 함성이 울렸던 공간 역시 종로다. 베이비부머들이 코흘리개였던 1960년 3·15와 4·19 당시 종로는 부정선거 규탄의 발원지였다. 이듬해 5·16이 일어나자 박정희(朴正熙) 등장을 지지하는 육군사관생도들의 행렬도 종로에서 이뤄졌다.
박 PD는 1964년 무렵 종로6가와 동대문에서 데모 현장을 지켜본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7~8세에 불과했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다큐멘터리 PD의 자질이 유년시절부터 있었음에 틀림없다.
“1964년부터 서울시내에 데모가 잦았어요. 어른들은 ‘박정희가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경제발전을 위해 일본과 국교를 맺는다’고 했고요.”
당시 1964~65년의 전국은 온통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날이 샜다. 초여름에 접어든 6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이 소위 6·3사태라고 하는 날이었다”고 했다.
“당시 제가 살던 곳은 종로6가 이대부속병원과 동대문 앞 광장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어요. 동대문에는 전차 종점이 있고 광장이 개방돼 사람들이 늘 모였는데 그날 갑자기 엄청난 함성과 구호가 들리고 경찰 사이렌이 온 광장을 덮었죠.”
시위대가 드디어 동대문광장을 거쳐 종로5가 쪽으로 움직이는데 마치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파출소 유리창이 다 깨지고 책걸상이 엎어져 있는데 경찰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학생들은 어디서 탈취했는지 군용 지프를 개조한 백차(경찰차량) 위에 10여 명이 올라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박 PD는 그 시절, 매년 이런 시위를 종로에서 보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종로5가 쪽에서 탱크가 나타났어요. 탱크에는 무장한 군인 몇 명이 함께 경계를 하며 느린 속도로 오다가 학생과 시민의 인파 속에 멈춰 섰어요. 잠시 후 어느 학생이 탱크 위에 올라가 뭐라고 구호를 외치니까 많은 사람이 호응을 했어요. 그때 어떤 군인이 탱크 밖으로 나오더니 시위대를 향해 뭐라고 하더니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데, 잠시 후 탱크가 포탑을 돌려 되돌아갔어요.”
존슨 美대통령의 訪韓과 종로
1966년 10월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소년 박승찬’은 서울시민 총동원령에 따라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지정된 장소인 광화문로터리에서 담임선생님의 인솔하에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은 철거됐지만 세종로사거리에는 큰 아치가 서울역 방향으로 나 있었다. 철로 만든 반원형 아치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연도에는 동원된 학생과 시민이 팔이 아프도록 양국 기를 흔들고 있었다.
“드디어 ‘존슨’이 오고 있었어요.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더니 연도 앞쪽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났어요. 하늘에는 꽃가루가 함박눈처럼 내리고 브라스 밴드의 연주까지 사방은 온통 환영열기로 뜨거웠어요.”
그러다 갑자기 사람들이 경호 통제선 앞으로 확 떠밀려 갔다고 한다. 통제선이 무너지고 순간 눈앞에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존슨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오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자기가 동원됐다는 사실을 잊은 채 발을 구르며 존슨과 더 가까워지려고 난리가 났어요. 마침 존슨은 환영인파와 악수를 하려고 손을 길게 내밀었어요. 저는 얼떨결에 존슨과 손을 마주 잡았죠. 엄청나게 큰 손이 조막만한 제 손을 잡았는데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사진기자들의 셔터소리가 요란하게 터졌어요. 순간 제 입에서 ‘존슨 대통령 만세’ 소리가 났습니다.”
다음해인 1967년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이 방한했다. 늘 그랬듯 종로에 있는 학교라는 이유로 동원돼 열심히 태극기와 서독기를 흔들었다.
“이런 동원문화는 5공까지 계속됐는데, 중·고교 때도 일상적이었어요. 학생들은 수시로 불려가 박수와 구호를 외쳤습니다. 만약 지금도 이런 식으로 차출한다면… 어떨까요?”
당시 종로5가와 6가 사이에는 화학실험기구와 의료기를 파는 가게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고무관에 ‘마우스피스’ 조각 같은 게 달려 있던 ‘폐활량계’가 박 PD의 기억에 남아 있다.
“마우스피스를 입에 대고 힘껏 바람을 불어넣으면 유량계처럼 생긴 게이지가 올라갑니다. 길 가던 행인들이 서로 해 보겠다고 줄을 서곤 했어요. 한 사람이 끝나면 주인은 꼬질꼬질한 손수건을 꺼내 마우스피스를 쓱 한 번 문지르고는 다음 사람에게 넘깁니다. 다음 사람은 몇 번 심호흡하고선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있는 힘껏 바람을 분 후 어지러운 듯 휘청거리며 게이지를 보지요.”
주인은 행인에게 뭐라고 엄한 진단을 내렸다. “이런 모습이 마냥 재미가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곤 했다”고 말했다.
더욱 재밌는 경우는 체중계와 신장계. 길바닥에 떡하니 놓고 호객을 하는 것이었다. 행인들은 너도 나도 심각한 표정으로 체중계와 신장계 위에 올라섰다. 주인은 의사인 양 막대기로 지시하며 “아! 숨 쉬지 마세요”라거나 “발꿈치 들지 마세요”, “좀 가만히 있어요”라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등·하굣길에 큰 볼거리를 제공했던 ‘길거리 의료검사’. 아마 지금 이런 식으로 영업했다가는 쇠고랑을 찰지 모릅니다. 그만큼 혈압을 재거나 폐활량을 검사할 일이 없던 시절이었죠.”
이처럼 종로는 아직도 그에게 추억의 공간이다.
- 광주 기억은 5·18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58년 개띠들에게 광주는 1980년 5·18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5·18 이전의 광주는 지금의 광주가 아니다.
그들은 5·18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사건을 겪으며 광주라는 도시가 한국현대사의 거대한 서사적 공간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5·18의 현장인 전남도청과 망월동 묘지, 옛 상무대 영창은 국내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민주화의 공간이 되었다. 광주 충장로에서 나고 금남로에서 자랐다는 58년 개띠인 백인영씨는 이런 말을 했다. 5·18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58년 개띠들에게 광주라는 공간은 생존의 공간이었어요. 유년이나 학창시절의 광주 기억은 5·18을 통해 빛이 바래고 말았어요. 당시 우리들은 대학생이거나 직장인이거나 생애에서 가장 뜨거운 심장을 가졌을 때지요.
광주는 이제 특수한 도시가 됐어요. 도시가 갖는 문화나 경제, 시세(市勢)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맥락에서 말입니다. 광주 5·18은 광주의 민주주의를 세상에 알린 일대 사건이니까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금남로는 광주의 동맥(動脈)이라고 부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사의 거리죠. 당시의 유동삼거리는 이제 사거리로 변했고 모든 것이 낯설어졌지만 잊을 수가 없어요. 5월의 그날 광주 중앙로 주변의 산수동과 계림동 일대 주택을 뒤지던 군홧발도 기억나고요. 그 어딘가에 58년 개띠들의 아픔도 섞여 있을 겁니다.”
1980년 5·18 이후 금남로는 58년 개띠에게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1995년 도청과 망월동, 구 상무대 부지를 축(軸)으로 하는 기념공간이 조성됐고 1997년부터 묘역과 공원으로 단장됐다. 주요 항쟁공간이나 건물은 사적지로 지정됐다.
“58년 개띠들은 낀 세대라고 할까요? 근대와 현대의 낀 세대, 시험과 뺑뺑이의 낀 세대, ‘얼차려’와 민주 군대의 낀 세대죠. 늘 전환기에 내몰렸지요. 어린 시절, 배고픔의 설움을 부모님과 함께 느끼며 자랐는데, 어느새 그 배고픔을 극복한 세대가 됐어요. 이쪽저쪽 문화를 다 접했으면서도 어느 한쪽에 속하지 않는 주변인 세대라고 할까요?”
이 의원은 학창시절, 곡성에서 광주로 전학을 갔다. 대단한 결심이었다.
“광주는 꼿꼿한 곳이었죠. 광주학생 의거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25시》의 작가 게오로규가 스스로 찾아와 강연을 했던 도시였어요. 문화가 넘치는 예향의 자긍심도 컸습니다. 그 시절, 곡성에서 광주로 가는 것은 대단한 유학이었죠. 시외버스도 잘 안 다니는 두메산골에서 광주라는 대도시로 나가니까요. ‘아이스께끼’는 봤어도 ‘아이스크림’을 보지 못했었고 용어 자체도 몰라, 사 먹고 싶어도 이름이 낯설어 못 사 먹을 정도였어요. 그 시절, ‘문학동인회’에서 활동하며 여학생과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일이 있었어요. 친구한테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어라’는 귀띔을 듣고, 주문하려 해도 매끄럽고 도회(都會)스런 ‘아이스크림’이란 말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어요. ‘저거요’로 해결했지만요. 한번은 파란 사과를 처음 보고 ‘모과’라고 우기다 순천에서 온 친구에게 망신을 당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빨간 능금만 봤지 파란 사과(아오리)를 본 적이 없었거든요.”
한국의 민주주의와 광주라는 공간
—학창시절, 광주라는 공간은 어떤 곳입니까. 사복 입은 학생들이 자주 가던 곳은 어디였나요.
“사글세를 얻어 친구 2~3명씩이 자취하던 시절, 사복 입고 충장로에서 놀 형편은 못 됐고 그저 ‘사직공원’에 가서 배드민턴 치는 것이 최고의 문화생활이었죠. 번화가에는 주눅이 들어 못 나갔어요. 빈털터리 촌놈이 무슨 배포로 광주 번화가를 돌아다니겠어요. 뒤집어 생각하면 그런 촌놈에게 광주는 무궁무진한 흥미와 꿈을 갖게 했던 공간이죠.”
19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58년 개띠는 대략 22~23살이다. 피 끓던 20대초의 나이에 총검의 아비규환을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5·18진압군 중 적지 않은 수가 58년 개띠였다는 사실도 역사적 아이러니다.
“1980년 당시 제가 재수를 하고 대학교(동국대 정외과)를 들어가 2학년이었어요. 입대일이 그해 6월 25일이어서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다가 상황이 다 끝난 뒤에 5·18 소식을 대충 들었어요. 그런 제가 국회의원이 되어 5·18 30주년이 된 해에 5·18단체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광주인권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5·18은 호남출신 58년 개띠에게, 개인차는 있겠지만, 정신적 신체적 경험이고 경력이죠.”
—광주라는 서사적 공간이, 5·18 이전과 이후로 달라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광주라는 도시가 민주항쟁을 겪으며 어떻게 변모했다고 보십니까.
“광주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변했을 뿐이죠. 겉으로 광주는 지금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차분하고 평화로운 도시입니다. 광주 사람들의 아픔은 아픔대로, 성숙은 성숙함대로 가슴에 묻고 일상을 유지한다고 봅니다. 광주의 5·18이 지닌 무형의 가치를 따진다면 형언할 수 없죠. 민주주의 쟁취과정에서 거듭된 희생과 투쟁이 멈추는 계기, 즉 전환점이었지 않습니까? 대량 구속으로 인한 인재들의 학업중단·분신·긴장이 어느 정도 해소됐고 투쟁에너지가 또다른 발전의 동력으로 전환됐다고 봅니다. 1980년대 민주화의 완결은 광주가 큰 기여를 했다고 보고, 이는 수많은 시민의 희생 대가였다고 봅니다.
—호남(광주)에 살고 있는 58년 개띠, 친구들의 근황은 어떠한가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주축이죠. 문화, 예술, 산업, 공직, 농촌마을에서 58년 개띠는 지금 가장 주도적인 위치에 있어요. 그리고 결속력과 동질감이 참 남다른 것 같아요. 전혀 모르는 동갑내기들끼리 58년 개띠 광주 전남 모임을 정례적으로 갖고 있어요. ‘무술회’라고 부르죠. 그 모임에 가면 바로 서로 말을 놓습니다. 교육감, 국회의원, 도지사 출마자, 산림조합 중앙회장, 시장, 군수들이 수두룩한데 모두가 처음 봐도 친구라고 부릅니다. 산업화, 민주화, 현대화 과정을 전부 겪은 58년 개띠들은 그만큼 모두가 의젓하고 성숙해 보여요. 주변에서 항상 일꾼이고 조정자고 해결사들이죠. 58년 개띠들이 살아 온 삶이 그들을 생각 깊은 중년으로 만든 거죠. 자랑스러운 제 친구들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베이비부머의 공간, 아파트
아파트는 이념적 보수화의 基地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가 도래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시기로 보면, 58년 개띠를 위시한 베이비부머가 군에서 돌아와 복학과 졸업, 취업과 결혼 전선에 뛰어들던 즈음이다. 수출호조와 해외건설 활황으로 거의 완전고용이 이뤄졌고 대개의 공고와 상고를 졸업한 베이비부머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섬유공장과 기계공장, 건설현장에서 일자리를 쉽게 구했다.
이 시절, 컬러TV와 전화기, 냉장고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아파트가 선호도 측면에서 단독주택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파트는 한국의 주택보급률을 높이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대도시로 몰려드는 베이비부머들의 잠자리를 확실하게 해소하는 방법은 성냥갑 아파트를 마구 ‘복제’하는 방법뿐이었다.
‘현대 한국의 주거사회학’이란 부제를 단 《아파트에 미치다》의 저자인 서울대 전상인 교수의 말이다.
“성냥갑 같다는 비난에도 불구, 아파트가 오랫동안 가장 효율적인 주택공급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죠. ‘성냥갑 아파트’라고 하지만, 신속하고 저렴하게 주택을 공급하려면 아파트를 규격화하는 방식이 경제적으로 유리했어요. 다시 설계할 필요도 없었고 당연히 비용도 적게 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서울시내 아파트 가격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전후해 전반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여기다 전반적인 경기호조로 국민의 실질소득이 급증했다.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정부는 아파트 위주의 주택정책을 택했고, 아파트는 한국의 산업화과정에서 제공된 개인적 기회이자 성취의 대상이 되었다.
58년 개띠와 베이비부머들은 아파트에서 주로 생활하며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게 됐다.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인 나라에서 주택소유 계급이 되는 자기만족감의 의미를 결코 경시할 수 없다. 그러나 “가족주의를 심화하고 소비주의를 촉진,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확대 재생산에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는 측면”(전상인 교수)이 아파트에 있었다.
이념적 보수화의 기지로서, 그리고 중산층 신화의 무대로서 아파트에는 나름대로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내재할지 모른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 가난을 겪은 베이비부머 세대의 ‘안정 희구’ 의식이 담겨 있다. “거시적 사회변혁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파트가 육성한 소자산 집단과 중산층 계급은 역사의 걸림돌로 여겨질지 모른다. 실제 한국의 화이트칼라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한국사회의 이념적 좌경화를 막는 결정적인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가 이념적 보수화의 기지라는 시각은 많이 달라졌다. 전 교수의 말이다.
“베이비부머가 아파트를 사 중산층으로 살 때만 해도 보수적인 측면이 강했어요. 그런데 오늘날은 아파트 한 채로는 큰 의미가 없고, 특히 중산층이 세대간 재생산되지 않으니 미래에는 이들의 이데올로기도 진보쪽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베이비부머에게 기회의 땅, 울산
울산만큼 58년 개띠들에게 기회의 땅이 또 있었을까. 울산은 그야말로 산업화의 최전선에 선 도시다. 1980~90년대 울산의 골목 개들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1962년 공업단지 조성이 시작된 뒤 한국 산업발전의 전초기지였던 울산, ‘태화강의 기적’이 일어났던 곳이다.
‘단일 공장 세계 최대’라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하루 평균 6000여 대 생산)이 있고, 1972년 터를 잡은 세계 1위 조선업체 현대중공업이 이곳에 있다. 국내 최초의 정유공장에서 출발해 세계 최대의 에너지 화학 산업단지로 발돋움한 SK에너지도 울산에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급격한 경제성장 덕에 울산의 58년 개띠들은 콧대가 셌다고 한다. 주머니가 넉넉하니 기죽을 일이 없었고, 어느 대도시보다 세련된 서울의 패션을 받아들였다. 상대적 빈곤도 없었다.
58년 개띠인 울산 ‘앤양품점’ 이춘애 대표는 도심 한복판에서 옷가게를 하며 울산 멋쟁이들의 폼생폼사를 지켜봤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그 시절이 힘들거나 어렵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초등학교를 장생포에서 다녔는데, 그 동네가 1960년대 치고는 수준이 꽤 높았다고 기억해요. 포경을 허용하던 시절이어서 등·하굣길에 산 같은 고래가 높이 매달려 있던 광경이 기억나요. 아버지에게 고래잡이하는 친구가 많았고, 장생포에 울산 부유층의 10%가 산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여기다 울산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더 풍요로워지기 시작했죠.”
그녀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25살에 울산 옥교동에 작은 옷가게를 열었다. 당시 옥교동은 울산에서 가장 번화한 곳. 전두환(全斗煥) 정권 초기인 1982년 교복자율화가 단행되면서 우중충한 교복에 갇힌 학생들의 맵시 욕망을 자극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패션에 관심이 많아 어린 나이에 창업을 한 편입니다. 1980년대부터 제일모직이나 반도패션 등 대기업에서 만드는 딱딱한 정장 스타일의 옷이 나오다가 80년대 중반부터 타운캐주얼을 표방한 패션 브랜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E랜드의 브렌따노, 헌트, 언더우드, 뱅뱅과 조다쉬 청바지를 비롯해 TV 패션 광고시대를 열었던 논노와 조이너스, 페페 등이 브랜드 이름을 높였다. 당시 국내 패션시장은 폭발적인 성장기에 들어섰고 ‘만들면 무조건 팔리는’ 신화를 썼다. 1990년대 들어서는 게스, 안전지대, 겟 유즈드, 인터크루, 엘레쎄 등이 ‘멋 좀 부릴 줄 아는’ 아이들의 브랜드였다.
“6년 정도 옥교동에 있었는데 풍요로웠다는 기억이 나요. 80년대는 불황이 없었어요. 그런 산업화 덕분에 울산이 ‘공해도시’라는 오명이 붙었지만, 지금은 조경이나 도로가 굉장히 잘된 도시가 됐어요. 다른 도시에 가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58년 개띠를 비롯한 베이비부머 집단들이 대거 울산에 몰려 오늘의 산업도시로 만들었다. 울산항과 방어진항·온산항을 끼고 있는 울산은,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 등 대기업 본사가 있고 한국석유공사·한국동서발전 같은 공기업도 많다. 이춘애 대표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58년 개띠 제 동기들 중에 고교 졸업 후 바로 공단에 취직한 친구들이 많아요. 현장직에 있으면서 연봉이 1억원을 넘습니다. 사무직처럼 진급은 안 돼도 대개 안정적인 생활을 합니다. 울산은 그만큼 살 만한 도시고, 58년 개띠들에게 기회의 땅이었죠.”
58년 개띠와 ‘회사형 인간’의 悲哀
누군가의 아들·아버지로 조직을 위해 충성했으나…
소설집 《오팔년 개띠》의 저자 김문(金文)씨는 58년 개띠를 이렇게 규정한다.
‘6·25 전쟁 후 한국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민주화와 산업화의 격동기를 겪은 세대’라고. 이들이 태어난 시대적 토양은 ‘생존(生存)’이었다.
“사회 첫발을 디딜 무렵인 1979년 2차 오일쇼크로 극심한 불황과 인플레를 겪었고, 마흔을 넘긴 1997년말 IMF 사태를 맞으며 경제적·사회적 혼란을 겪었어요.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 은퇴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에코세대’라 불리던 자녀들도 취업난에 허덕이게 되었죠. 자녀만큼은 자신들보다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살아 왔던 베이비부머 가장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어요.”
58년 개띠는 ‘나’보다 ‘우리’가 우선인 통념 속에서 누군가의 아들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아 왔다. ‘회사형 인간’으로 조직을 위해 충성하며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으나 은퇴 후의 삶 또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전철이나 길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우리 시대의 가장들, 그들 삶을 파헤쳐보면 한 편의 질펀한 드라마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윗선에 눈치보기·외줄타기와 아랫돌들의 반란 또한 민감하게 감지해야만 했지요. 고개 숙이라면 알아서 엎어지고, 엎어진 김에 구두까지 닦아 주며 직장상사의 눈치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회사형 인간의 비극이네요.
“이럴 때, 나 하나의 몸이라면 이렇게까지 치사해지지 않아도 되고, 때론 건방 떠는 상사에게 ‘확 질러 버려?’ 하는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혼자 화장실 거울 보고 삿대질 해대며 분풀이할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그대 앞에 서면’ 작아지는 내 모습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58년 개띠들의 대학시절은 어떠했나요.
“교문 앞을 장갑차가 지켜도, 길가는 우리들 가방을 군인들이 뒤져도 ‘그래 우린 빨갱이와 휴전상태니까’ 하고 껄끄럽긴 하지만 한풀 접어 줄 수 있었어요. 불의에 분노할 줄도 알고 주장을 맘껏 펼쳐 보고도 싶지만 결코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우리의 발을 묶었습니다. 자신보다 가족을 생각하면 어떤 행동도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술을 핑계 삼아 갇힌 현실을 절규했지만 결론은 자신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오늘날 58년 개띠들은 어떤 모습일까. “억울함을 토로할 여유조차 없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뒷방으로 몸을 감춰야만 하는 세상 분위기”라고 했다.
울산 舊도심의 황금시절
중구의 거리와 골목과 건물들의 공간은 수많은 문화기록이 내재돼 있다. 1970~8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중구의 성남동과 옥교동, 교동, 북정동 일대의 옛길과 골목은 지금의 50~60대에게 추억의 공간이다. 《울산여성신문》 최일성(崔日成) 전 주필의 말이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울산은 다른 대도시에 비해 형편없었어요. 토착 주민의 살림도 아주 어려웠고요. 공단이 세워지면서 ‘삼산벌’이라고 불리는 ‘월평’을 개발하면서 주택과 상가가 세워졌어요. 월평이 지금의 삼산동입니다. 일제시대에는 그곳에 간이 비행장이 있었고 주변이 온통 논밭이었어요.”
“옥교동은 울산초등학교에서 시계탑사거리를 거쳐 울산다리까지의 도로 중앙을 성남동과 양분해 발전하면서 울산 번영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어요. 울산 상권이 밀집해 있던 동네답게 재래식 건물이던 울산극장에 이어 ‘시민관’이란 이름으로 신식 건물의 극장이 최초로 생긴 곳이 바로 이곳이죠. 이 ‘시민관’은 성남동에 천도극장과 태화극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울산 제일의 극장이었어요.”
밴드가 등장하는 ‘바(bar)’가 울산에 최초로 생긴 곳도 옥교동이다. 최 전 주필은 “조양백화점(울산 최초의 백화점) 2층으로 기억된다. 상호는 황금마차. 술값이 만만찮아서 지방 유지나 학교 선생님이 단골로 왔다”고 말했다. 옥교동 중앙시장 입구(구 현대백화점 성남점 건너편)에 울산 최초의 카바레가 황금마차보다 2년여 앞서 문을 열어, 순박하던 울산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고 한다
“옛날엔 노조파업을 하면 울산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호응을 했어요. 요즘은 안 그렇습니다. 연봉 1억원이 넘는데 무슨 시위냐고 해요. 그런데 잘사는 울산을 누가 일궜느냐. 58년 개띠와 베이비부머들이 땀흘려 일궈 놓은 겁니다. 주말과 휴일에도 공장에 나가 일했다는 사실을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알까요? 그런 희생 위에 지금의 울산이 있는 겁니다.”
동성로, 保守도시 대구의 해방구
서울이 명동이라면 대구는 동성로다. 58년 개띠와 베이비부머들에게 동성로는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주말에는 대구시민 10명 중 1명이 동성로에 나올 정도로 보수도시 대구의 해방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1970~80년대 동성로의 유동인구 80%를 10~20대가 차지했는데 58년 개띠들도 전성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58년 개띠의 앞 세대는 향촌동에서 한 시절을 보냈다. 향촌동은 우리나라의 ‘피란 예술’이 꽃을 피운 곳이다. 화가 이중섭이 담배 은박지에 ‘소’ 그림을 그렸던 백록다방이 있고, 시인 구상과 마해송이 단골이었다는 화월여관이 향촌동에 있었다.
그러나 1968년 대구백화점(이하 대백)이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젊은이들의 약속장소가 ‘대백광장’으로 옮겨지고 향촌동의 전성시대는 문을 닫았다. 4년 뒤인 1972년 대구 최초의 패션전문 백화점인 동아백화점(이하 동백)이 동성로 시대를 부추겼다. 그 시절 동성로 주변 빌딩을 방패 삼아 노점들이 대백부터 동백까지 장관을 이루었고, 58년 개띠들은 동백과 대백 사이를 오가며 한 시절을 보냈다.
토털패션 ‘샵 A-hab’ 영등포점 대표인 최재영(崔栽榮)씨는 58년 개띠들과 함께 1970~80년대 동성로 언더그라운드에서 청춘을 보냈다. 생생한 당시의 동성로 공간을 기자에게 들려줬다.
“1970년대 초반 중앙공원(지금의 경상감영공원)에 흩어져 있던 학사주점들이 대백 인근과 봉산동 쪽으로 하나둘 옮겼어요. 1980년대는 막걸리와 파전, 빈대떡 등을 주로 파는 민속주점까지 모여들면서 동성로를 발전시키는 하나의 동력이 됐습니다.”
통기타를 앞세운 ‘생맥주 라이브바’가 등장한 것도 그즈음이다. 최 대표의 말이다.
“58년 개띠와 베이비부머들은 교동시장 입구 왼쪽에 있던 ‘해바라기’와 대백 북쪽에 있던 ‘이브 살롱’, 코리아백화점에 있던 ‘코리아 음악감상실’을 자주 찾았어요. 그 후 술과 노래, 쇼 등이 어우러진 성인 극장식 회관인 ‘뉴대구회관’ ‘은하수회관’ ‘123’ ‘십자성’ ‘관광열차’ ‘팔도강산’ 등이 생겨났어요. ‘만경관(영화관)’ 부근의 ‘금잔디회관’에는 여성 5인조 그룹사운드가 전속공연을 할 정도로 인기가 꽤 높았던 것 같아요. 그때가 58년 개띠들이 대학생이나 사회생활 3~4년차 혹은 군복무를 하고 있었을 시기입니다.”
동성로는 중앙파출소에서 대구역 맞은편 대우빌딩 사이 약 1km를 말한다. 한일극장이 있는 한일로를 중심으로 동성로1가와 2가로 나뉜다. 1988년 이전에 동성로1가가 메인상권이어서 대구역을 중심으로 교동시장, 동백이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동성로2가를 중심으로 의류대리점들이 들어서게 됐다.
최 대표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동성로의 또다른 문화는 음악감상실, 음악다방 문화였다”고 기억한다. 당시 휴대전화 같은 통신수단이 없었기에 친구들과의 약속은 편지나 엽서, 아니면 다음 만날 날을 먼저 정해 놓고 헤어졌다고 한다.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한순간 꺼져 버렸었어요. 동백 부근 ‘빅토리아’, 중앙파출소 부근 ‘심지다방’, ‘목마다방’, ‘올림푸스’가 있었고 대백 부근에 레스토랑과 음악감상실이 결합된 ‘무아’라는 업소가 문을 열었어요. 그후 동성로에는 수십 개의 음악감상실이 성업 중이었는데 1980년대 후반 약속한 듯이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그저 고전음악을 들려주던 대구극장 부근에 위치한 녹향과 하이마트만 남았을 정도죠.”
“대구 교동시장(당시 동백 뒤편)엔 도깨비시장이란 곳이 있었어요. ‘도깨비’라는 이름은 없는 물건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는데, 밀수 단속반이 뜨면 단 몇 분만에 가게 셔터를 내렸다가 단속반이 지나가면 다시 순식간에 떠들썩한 시장통으로 변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어요. 그곳엔 식품, 영양제, 화장품부터 옷과 귀금속, 민속품 등등 없는 것이 없었죠. 주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를 팔거나, 밀수로 들여온 것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대구는 누가 뭐래도 섬유도시다. 대구를 떠나지 않은 많은 베이비부머들이 섬유공장에 취직해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대구 섬유산업은 1970~80년 수출입구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당시 지역의 선도기업은 제일모직, 코오롱, 대한방직 등이었으며 동국, 성안 등 역동적인 중견기업들도 무수히 많았다.
섬유는 내수보다 수출이 주상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를 찾을 때는 제일모직과 코오롱을 반드시 들렀다고 한다. 김문씨의 계속된 이야기다.
“1970~80년대 중동(中東) 붐을 타고 중동 여성들이 쓰는 차도르 원단을 수출해 한국산 원단이 최고라는 호평을 받으며 대구 섬유업이 호황을 누렸어요. 그 시절, 파리·밀라노 패션이 다음 날 한국에서 같은 상품이 쏟아질 정도로 대구의 직조·의상 카피 능력이 뛰어났었나 봅니다.
1970년대 후반 한국에서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생산된 나이키가 세계시장에 팔리면서 한국의 신발기술이 향상되었어요. 당시 친정아버지께서 나이키 신발 소재였던 ‘타이어코드’라는 원사를 일본에서 수입해 화승과 동양고무, 국제화학에 납품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자동차 타이어 소재 섬유인 ‘타이어 코드’는 현재 SK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마산과 월급 1800원 시절
58년 5월 5일생인 시인 서정홍(徐正鴻)씨는 경남 마산(지금은 창원)에서 태어났다. 말이 좋아서 ‘마산시(市)’지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한 동네였다. 가난은 전염병처럼 시인 가족을 못살게 굴었다. 형제들은 아무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형은 공장에서 돈을 벌어 야간고를 나왔고 누나들은 모두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부산 가발공장, 대구 섬유공장으로 돈 벌러 갔다.
“1970년, 그때 월급으로 1800원을 받고 자동차부품 공장에 다니며 번 돈으로 뒤늦게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까닭은 아무리 술에 취해도 ‘사람은 배워야 사람이 된다’고 하신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면서 제가 동무들 앞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것은 손톱 밑에 끼인 기름때였어요. 아무리 씻어도 씻어도 날이 갈수록 시커멓게 쌓이는 기름때는 저를 늘 움츠러들게 했어요. 기름때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을 그 나이에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의 아버지는 술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굶어서 돌아가셨다. “막노동판에서 중참으로 나오는 빵 한 조각 목으로 못 넘기시고 자식놈들 먹일 거라고 보물처럼 싸서 집으로 가져오시던 어머니셨다”고 기억했다.
그는 몸으로 느끼고 일하며 경험한 세상을 시로 썼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일하는 사람의 시가 진짜 시’라고 느끼게 됐다고 한다. 땀으로 쓴 시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1978년부터 1990년까지 작은 공장을 거쳐 창원공단 대한중기와 효성중공업에서 일했다. 1992년 제4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공단을 떠나 진주로 이사를 했다. 진주 상평성당에서 성당지기를 하면서 ‘우리말·우리글 살리기 모임’과 ‘가톨릭노동상담소’를 열었다. 당시 쓴 시 중에 <58년 개띠>라는 시가 있다.
<… 58년 개띠 해 /오월 오일에 태어났다, 나는
양력으로는 어린이날 /음력으로는 단옷날
마을 어르신들 / 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 / 잘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되어 / 나는 지금 출세하여 / 잘살고 있다
(중략)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 / 날짜 하루 어긴 일 없고 / 공짜 술 얻어먹거나 / 돈 떼어먹은 일 한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 노동의 대가 훔친 일 없고 / 바가지 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살고 있다 …>
58년 개띠와 귀촌·귀농의 공간
시인은 1996년 생명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귀농을 결심, 남들보다 일찍 경남 함양 덕유산 기슭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일본에서 생활협동조합운동과 쿠바에서 유기농업 공부를 하고 돌아와, “사람은 모름지기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다”는 걸 깨닫고, 노동자 대신 농부가 되었다.
현재 합천 황매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열매지기공동체’와 청소년과 함께하는 ‘담쟁이 인문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권의 시집과 동시집, 산문집을 펴냈다. 그는 은퇴 후 귀농을 꿈꾸는 58년 개띠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1950~60대 귀촌 인구가 늘어나는 까닭은 베이붐 세대인 1955~63년생의 은퇴가 시작된 데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깨끗하고 경치 좋은 농촌 지역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월 경남도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도내 시·군별 귀농·귀촌 가구 수는 2305가구라 합니다. 연령대별로는 50~60대가 58%, 30~40대가 31%라 합니다. 2007년보다 8배 이상 늘어났다고 해요. 대부분 50~60대는 귀촌이고, 30~40대는 귀농인 것이지요. 전국 여러 도마다 귀농·귀촌 가구 수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해마다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58년 개띠들의 귀농, 어떻게 보세요.
“사람이 메마른 도시를 버리고, 생명이 살아 숨쉬는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은 쉽게 도시를 떠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도시가 메마르다 해도 정든 삶터를 떠나 새로운 삶터에서 살아가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기까지 하니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해요.
그러나 용기 하나만으로 이룰 수는 없습니다. 자연 속에서 정직하고 소박하게 살 계획을 자세하게 세워야 해요. 언제쯤 농촌으로 돌아갈 것인지 식구들과 잘 의논해야 하고요. 뜬구름 잡듯 대충 세우지 마시고 ‘자세하게’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귀농한 선배들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시인은 꼼꼼히 챙겨야 할 게 수없이 많다고 했다. 군마다 귀농지원금이 나온다던데 어디에 알아보면 되는지, 집터를 어떻게 구했는지, 집은 누가 지었는지, 정착하는 데 돈은 얼마나 들었는지, 무슨 농사를 지으며 사는지, 힘든 일은 없는지, 무얼 먹고 사는지,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는지, 여가 시간에는 무얼 하는지, 토박이 이웃들이 텃세가 세다는데 어떻게 하면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지….
“책을 읽고 깨닫는 것도 큰 힘이 되지만, 직접 가서 보고 듣는 게 훨씬 더 큰 힘이 됩니다. 바쁜 일손을 거들며 막걸리 한 잔 나누다 보면, 앞으로 어찌 살 것인가 금세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이웃과 더불어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선배를 만나야 합니다. 스스로 가난하고 스스로 불편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만이 정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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