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2] 이승만과 6·25, 그리고 박정희
白 "이승만, 美사령관들 불평하면 美 헌법정신 거론하며 꾸짖어"
金 "6·25는 시련이었지만 대한민국이 국제화되는 계기로 작용"
白 "사회주의적 개혁? 자유민주주의를 이길수 있는 것은 없어"
金 "이탈리아 前공산당원이 충고하더라, 절대 북한 믿지말라고"
1950년 8월 21일. 대구 북방 22㎞ 다부동 전선(戰線)이 급박해졌다. 천평동 협곡 좌측방 고지를 지키던 국군 1사단 11연대 1대대가 북한군 공세 소문에 후퇴하고 있었다. 고지가 적에게 넘어가면 협곡 아래 있던 미 27연대의 퇴로가 막히고, 다부동 전체 전선이 무너질 수도 있다. 백선엽 1사단장은 지프를 타고 최전선으로 달려갔다. 산등성을 내려오는 장병 앞을 막아섰다. "우리가 더 물러설 곳은 없다. 내가 앞장선다. 내가 두려움에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백선엽은 권총을 뽑아 들고 적들이 넘어오는 고지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장병들이 뒤를 따랐고 고지를 재탈환했다. 군에서 '사단장의 돌격'이라 부르는 일화다.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사무실에서 김형석 교수와 '문무(文武) 100년의 대화'를 가진 백 장군은 당시 일을 회고하며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곳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다부동은 6·25전쟁 당시 최고 격전지였다. 서울~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핵심 축 선상에 있다. 백 장군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이곳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맹렬한 공세에 맞서 싸웠다. 매일 사상자가 700~ 800명 발생했다. 여기서 졌다면 대구·부산마저 점령당해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이후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뒤 대대적 북진에 나서게 된다. 김 교수는 이날 백 장군 손을 꼭 잡으며 "그때 잘 싸워주셔서, 나라를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이 되다
―일제 지배에 이어 6·25전쟁이란 큰 시련을 맞았지만 우리 민족은 이를 국가 부흥의 발판으로 삼았다.
백: 러시아 공산 혁명 이후 전 세계에 공산주의가 크게 퍼졌다. 동유럽과 중국, 동남아, 북한까지 진출했다. 6·25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급격히 팽창하던 공산주의 세력을 처음으로 저지했다는 의미가 있다.
김: 다부동 전투 때 난 부산으로 피란 갔는데, 모든 국민은 백 장군이 잘 싸워서 제발 우리나라를 지켜달라고 빌었다. 다부동이 무너지면 김일성이 부산까지 다 점령해 버리게 될 거라고들 얘기했다. 그곳은 대한민국의 생명선이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대령이었던 백 장군은 1950년 7월 준장을 단 이후 초고속 진급을 거듭해 1953년 1월 대한민국 군 역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부산의 임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오른쪽 어깨에,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왼쪽 어깨에 별 넷 계급장을 달아줬다. 이 대통령은 "자넨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이야. 옛날엔 임금만이 대장이었지. 지금은 리퍼블릭(공화국) 아닌가"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429호 백선엽(오른쪽) 장군 사무실을 방문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백 장군이 군 복무 시절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2001/10/2020011000004_0.jpg)
김: 역설적이지만 6·25전쟁은 대한민국이 국제화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군과 유엔군이 들어오면서 자유민주주의화가 급속하게 진행됐고, 일본과 가까워지면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전쟁이 계기가 돼 우리가 이렇게까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최근 들어 국내에 북한 공산 세력을 너무 모르고, 심지어 친북·종북 성향의 세력이 발호하는 분위기가 있어 대단히 걱정스럽다"고 했다. 김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처칠 총리는 '아직 공산주의와 3차 대전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미국 사람들은 그를 정신병자라고 했다"며 "그런 방심 결과,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터졌다"고 말했다.
김: 1972년 7·4 공동성명 발표 당시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한 전직 공산당원을 만났다. 그는 18년 동안 공산당에 몸담다 전년도에 탈당했다며 '한국은 절대로 북한을 믿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엔 민주주의도, 휴머니즘도 없다. 얼마든지 거짓말을 한다. 자신들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더라. 이 말을 문재인 대통령이 들었으면 좋겠다.
◇두 巨人, 그들의 리더십과 그림자
―지난 100년 우리 민족,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공을 만들었다. 누구 얼굴이 떠오르나.
김: 단연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개인으로 이름을 남길 사람은 그 두 사람뿐이다. 이승만은 독립과 건국, 전쟁 과정에서 대한민국을 자유와 민주 세계로 이끌었다. 미국과 강력한 동맹 관계도 구축했다. 자유민주 진영 쪽으로 가지 않았다면 지금 우린 가난한 아프리카 나라처럼 됐을 수도 있다. 박정희는 우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 줬고, 이후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백: 세계 흐름을 꿰뚫고 있었던 이승만은 높은 학식, 강한 의지력, 굳건한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6·25 때 미군이 우리 국군의 전투 능력에 불만을 표시할 때면 미국 헌법 정신을 거론하며 강하게 꾸짖기도 했다. 민주·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미국 건국 정신을 들며 약소국 한국의 사정을 이해 못 하냐고 했다. 그럴 때마다 워커·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 도쿄에 있던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등이 진땀을 뺐다. 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이승만은 말년에 군부대 시찰 때 야산의 묘를 가리키며 "저곳은 어느 집안 묘역인가"라고 묻고는 "집안이 잘 이어지는군" 하며 씁쓸히 말하곤 했다.
백 장군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맺은 특별한 인연도 털어놨다. 해방 이후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정보국장(대령)을 맡고 있던 백 장군은 군에 침투한 좌익·공산 세력을 뿌리 뽑는 숙군(肅軍) 작업을 총지휘했다. 이때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하다 잡혀 열흘 정도 뒤 수색에서 총살형을 앞두고 있던 박정희를 풀어줬다. 1917년생인 박정희는 백 장군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군 합류가 늦어 당시 소령이었다.
![대장에 진급한 백선엽(맨 왼쪽) 장군이 경무대에서 이승만(맨 오른쪽)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나누는 모습.](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2001/10/2020011000004_1.jpg)
―특별한 인연이 있어 석방했나.
백: 아니다. 박 소령은 그저 자신을 한번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짧은 경상도 사투리였는데 뭔가 진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렇게 해봅시다" 했다. 사실 당시 숙군 과정에서 실제 처벌받은 사람은 일부였고, 연행자(4749명)의 90%는 군문을 떠나게 하는 차원에서 마무리했다.
김: 박정희의 성공에는 뛰어난 용병술도 크게 작용했다. 정주영·박태준 등 인재들이 큰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백: 박정희는 나중에 대통령이 된 뒤에도 나를 '형' 또는 '백형'이라고 불렀다.
―1980년대 이후에도 기적적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성취가 이어졌다.
김: 이승만·박정희 두 사람이 뿌린 씨앗 덕분이다. 이후엔 대통령 개인의 역할이란 의미는 별로 없다. 예를 들어 전두환이 집권했을 때 박정희가 키운 경제를 망가뜨리면 어떡하나, 교육을 망칠 거야 하고 걱정했다. 그런데 대통령 되더니 난 경제 몰라, 교육도 몰라 하면서 모두 전문가에게 맡겼다. 그게 경제와 교육을 살렸다. 민주화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 세력이라는 큰 흐름이 만들어졌기에 가능했다.
―국내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백: 공산·사회주의는 유럽에서든, 아시아에서든 자유민주주의를 이길 수 없다. 해방 후 공산주의 좌익 세력은 모든 자산을 모든 사람이 함께 소유하자고 하더라. 불가능한 꿈이다. 공산주의를 내세웠던 그 어떤 나라도 그런 이상적 사회를 현실에서 구현한 적이 없다.
김: 일제 때 경성제대 3대 천재는 유진오, 이강국, 내 친구 박치원의 형인 박치우다. 치우 형은 안국동에서 현대일보를 만들어 가장 늦게까지 좌파 운동을 했다. 6·25전쟁 나자 치우 형제는 모두 북한으로 갔는데 이후 종적이 사라졌다. 남한에 있던 좌파 인사들은 북한 가서 다 숙청당했고, 우리 같은 북한 출신들은 남으로 내려왔는데 대한민국이 받아줬다. 남한에 있던 사람과 월남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빠르고 크게 성장시켰다. 안병욱 선생과 만나면 늘 이런 얘기를 했다.
[내 인생의 가장 빛난 날은…]
白 "신나게 평양 입성 1950년 10월 19일"
金 "인생의 열매 나눠주던 60~75세"
―인생 최고 전성기는 언제인가.
백: 1950년 10월 19일이다. 1사단장으로 국군과 일부 미군 장병 등 1만5000명을 이끌고 북한 수도 평양에 첫발을 들여놨다. 우린 6·25전쟁이 터진 후 다부동에서 김일성의 공세를 막아낸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고 북진에 나섰다. 그때 정말 신났다. 공산당을 물리치고 곧 통일이 될 것 같았다. 낮엔 패튼 장군처럼 1호 전차에 올라 진격했고, 밤엔 내려 장병들과 함께 걸었다. 내가 "평양"이라고 외치면 장병들은 "진격"이라고 외쳤다. 평양 입성만은 미군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다. 결국 미군보다 15분 앞서 평양에 '1착'했다. (평소 잘 웃지 않는 백 장군은 이때 입가에 얇은 미소가 번졌다.)
김: 내 경우는 60~75세였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인생은 3단계인 것 같다. 처음 30세까지 1단계는 배우는 시기, 60세까지 2단계는 일하는 시기, 그리고 3단계는 제2의 인생을 사는 시기다. 회갑 되고 정년을 맞았는데 강의도 더 잘할 것 같고 학문에 대한 의욕도 더 많아졌다. 이때는 나무로 보면 열매를 맺어 나눠 주는 단계다. 사회를 위해 살게 되더라. 철이 들고 사람으로서 성장한다. 기억력은 떨어지는데 사고력이 커진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10/2020011000004.html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3·끝] 아이젠하워, 정일권, 한미상호방위조약
白 "김일성, 만주군관학교 출신 포섭하려 정일권 등에 접근"
金 "함석헌 선생이 하던 학교 맡아 운영하던 중 北압박에 월남"
白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만나 한미방위조약 필요성 설득"
金 "미국보다 중국에 기우는 文정부, 어리석었다는 평가받을 것"
"한번은 김일성이 함경도에 있는 별장으로 김 목사님을 모셨데요. 점심 시간이 되자 김일성이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더니, 기도가 끝나자 '아멘' 하더래요. 목사님은 헤어질 때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주고 왔다고 하데요."
![지난해 11월 중순 본지 신년 특별기획 '文武 100년의 대화'를 위해 조선일보미술관에서 만난 백선엽(왼쪽) 장군과 김형석 교수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2001/30/2020013004253_0.jpg)
본지 특별기획 '文武, 100년의 대화'의 두 주인공 백선엽 장군과 김형석 교수는 1920년생 동갑내기로 해방 이후 김일성 정권이 북한을 장악하면서 남한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북한에 계속 남았더라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 장군은 1945년 12월 말, 김 교수는 1947년 여름에 월남했다.
―20대 젊은 나이였다. 남한으로 오겠다는 생각을 왜 하게 됐나.
김―그곳에선 살 수가 없었다. 일제 때 함석헌 선생이 하던 학교를 해방 후 내가 이어받았다. 북한 공산당 정권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학교에 대한 압박이 거세졌다. 학교 재정을 책임졌던 아버지 친구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공산당 간부였던 제자 중 한 명이 밤중에 찾아와 "선생님 학교가 사상이 제일 안 좋다고 찍혔다"며 빨리 피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고향을 등지게 됐다.
백―초기에 김일성은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포섭하려 했다. 정일권·김백일 등에게 접근해 "함께 나라를 건설하자"고 했다. 만주군관학교 4년 선배인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상의했다. 그때 "김일성은 처음에 우릴 이용한 뒤, 결국은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1945년 12월 중순 김일성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고, 우린 서둘러 북한을 빠져나와야 했다.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보는가.
김―이번 세기에 벌어질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공산주의의 멸종일 것이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들은 전 세계를 점령할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역사에선 그 반대로 공산주의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중국 공산당도 북한 정권도 그 운명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백―향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국가들은 살아남겠지만, 공산주의는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또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정치 지도자가 있는 국가는 살아남고, 사리사욕에 눈먼 지도자를 선택한 국가는 도태될 것이다.
백 장군은 한·미 동맹의 상징적 인물이다. 6·25 전쟁 때 미군과 함께 북한군·중공군과 맞서 싸웠고 전쟁 후에는 미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국군 전력증강·현대화 작업을 벌였다. 미군은 지금도 백 장군을 "우리 모두의 영웅"이라고 부른다. 1953년 5월 미국 방문 당시 6·25 전쟁 때 전우 알레이 버크 제독의 조언을 받아 일정에 없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면담을 성사시킨 뒤,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나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했고, 한·미는 1954년 역사적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백―미국은 6·25 전쟁 때 함께 피를 흘린 너무나 소중한 동맹이다. 우리는 미국과 동맹을 "포에버(forever), 포에버, 포에버" 갖고 가야 한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진영만이 우리의 소중한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함께 지킬 수 있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김―뉴질랜드에선 유능한 사람은 호주로 간다. 호주에선 유능한 사람이 캐나다나 영국으로 가고, 캐나다에선 또 미국으로 간다.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많은 사회는 편하게 살 수는 있지만 국가 발전이란 면에선 자유민주주의를 따라갈 수 없다. 경쟁이 심한 시기에는 선의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데, 이때는 자유민주주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과 독일 등 글로벌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백―지금의 상황이 6·25 전쟁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 정말 걱정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여전히 공산·사회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북한은 여전히 남한을 적화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우린 개방적인 해양의 문명권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1952년 12월 4일 경기도 광릉 수도사단에서 아이젠하워(앞줄 왼쪽에서 둘째) 당시 미 대통령 당선자가 망원경으로 기갑부대 기동, 포 사격 훈련을 참관하는 모습. 앞줄 왼쪽은 이승만 대통령이고, 백선엽 장군은 오른쪽 끝에 서 있다.](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2001/30/2020013004253_1.jpg)
김―식민지 역사가 길어서 그렇다. 더욱 큰 문제는 국가 지도자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를 악용하려는 데 있다. 한·일 문제를 풀려면 우선 사람들의 교류가 많아야 하고, 그다음에 문화 교류와 경제 교류가 튼튼하고 활발해져야 한다. 정치는 그다음이다. 맨 마지막이 돼야 한다.
백―1958년 참모총장 재직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일본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한일정상회담 배석을 위해 도쿄를 방문했을 때 이 대통령께 물었다. 언제쯤 일본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할 것 같으냐고. 이 대통령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데 40년이 걸렸다. 우리가 36년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니 적어도 40년은 걸려야 할 거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 7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일본과 관계가 험악하다.
―최근 국제 정세를 보면 중국이 우리 민족 앞날에 엄청난 먹구름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백―중국은 아주 오랫동안 한반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패권국가였다. 그 역사와 문화적 바탕에는 중화주의(中華主義)가 뿌리 깊다. 여기에 공산당 일당 독재가 탄탄하게 유지되고 있다. 개혁과 개방으로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경계가 필요한 나라이다.
김―앞으로 50~60년 동안은 우리를 비롯해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중국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할 것이다. 특히 우린 남북문제, 경제문제, 미국과의 외교 문제 등에서 중국의 엄청난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중국이 공산당 독재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될 때 비로소 달라질 수 있다. 그때까지 중국과 경제 협력은 하되, 정치·외교적으로는 거리를 둬야 한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미국보다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수십 년 지나서 보면 그렇게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는 평가가 나올 것이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숙제인 통일이 이번 세기 중에 이뤄질 수 있을까.
김―가장 먼저 알아야 할 점은 북한 정권을 그대로 두고는 통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 체제·사회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거나 현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 문제는 지금 정권을 그대로 둔 채 북한 체제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려면 강력한 고립 정책을 펴야 한다. 후진국 독재 국가는 군 때문에 유지된다. 군인이 배곯는 상황이 되면 독재 정권은 끝장이 난다.
백―통일까지 가는 길엔 수많은 난관과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해가 나든, 아무리 상황이 유리하거나 불리해도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게 있다면 그건 무력, 즉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약화시키는 그 어떤 유혹과 자만, 꼬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유한 나라와 강한 국방력, 즉 부국강병(富國强兵)은 나라를 지키는 토대이자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뉴 밀레니엄 시대 젊은이들에게…]
金 "국가·민족 넘어 세계시민으로 성장하라"
白 "사람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려 노력해야"
―올해 태어나는 2020년생과 꼭 100살 차이가 난다. 21세기를 이끌어갈 주역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김―100년 전 3·1운동을 계기로 가족 수준에 머물던 공동체 의식이 민족과 국가 수준으로 올라갔다. 우린 국가와 민족이 가족보다 먼저이고 중요하다는 깨달음이 퍼지는 시대에 태어나 자란 세대이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우리 젊은이들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시민으로 성장해야 한다. 폐쇄적인 민족 지상주의와 국가 전체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고전을 많이 읽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신적 성숙함 없이 국가는 자랄 수 없다. 다음으로는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반드시 가져보라는 것이다. 대학까지는 국내에서 나오더라도 대학원은 외국에서 다니라고 권하고 싶다.
백―내가 군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 작전, 전략과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주요한 전투에서 이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휴머니즘, 즉 사람에 대해 좀 더 진솔하고 깊게 이해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평양사범에 다니는 5년 동안 독서를 많이 했다. 책도 많이 읽었고, 신문도 엄청 읽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일까에 대해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어느 순간 세계를 보는 눈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자각의 순간을 우리 후손들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30/2020013004265.html
'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시 출근해 낮잠 2시간, 영화보고 4시 퇴근하는 공무원 있다 (0) | 2020.01.13 |
---|---|
65세 국민연금 52만원···공무원 연금은 5배 높은 257만원 (0) | 2020.01.12 |
규제 풀리며 꿈틀대는 일산 부동산…“꾼들은 미리 움직였다” (0) | 2019.11.14 |
“노후 준비와 주식투자는 마라톤 같은 여정” (0) | 2019.10.26 |
“반일종족주의, 최신 연구 외면한 채 ‘일베류 선동’ 반복하는 수준” (0) | 2019.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