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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의 모든 것] [Cover Story] 엿 먹이는 세상, 엿 먹기 좋은 세상

[엿의 모든 것] [Cover Story] 엿 먹이는 세상, 엿 먹기 좋은 세상

이런 엿, 저런 엿, 세상의 모든 엿

본디 세상은 엿 같은 것이다. 한 방에 씹어 먹으려 덤볐다간 강냉이 다 나가기 십상이니 시간 들여가며 혀로 살살 달래야 하는 것. 당 떨어지면 현기증과 두통이 오고, 뭔가를 씹어댈 때 비로소 인간은 집중한다는 점에서 엿 같은 것은 중요하다.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고, 합격 기원의 연속이고, 재수(再修) 없기 위해 엿 먹지 않을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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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엿 같다면 그것은 분투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엿의 점성으로 악착같이 들러붙어 살았으나 맛본 것이 쓴맛뿐이라면 이제 진짜 엿 먹을 차례. 대를 이어 엿을 만들고 있는 고강석씨가 힘 꽉 쥔 손으로 갱엿을 늘이고 있다. 두툼한 덩어리가 찐득찐득 호박(琥珀)의 빛을 터뜨린다. 정녕 저것이 엿 같아 보이는가?/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책을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74)는 쓴 적이 있다. 이때 '엿'은 일본어 원제로 '똥(くそ)'이었으나 아무래도 똥을 먹으라고 하기는 좀 그런 법이어서, 한국판 제목은 엿으로 바꿨다. 그러니 엿은 지극히 한국적으로 입에 붙는 말. 엿을 발음할 때 불가항력으로 혀를 빼물게 되는데, 욕이 아니면서 욕 같은 이 감각이야말로 엿 같은 것의 총체라 하겠다. 그러나 마루야마 겐지는 또 말하고 있다. "칠십 가까이 살면서 절체절명·고립무원·사면초가 등의 궁지에야말로 명실상부한 삶의 핵심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 안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에야말로 진정한 삶의 감동이 있다고 확신했다."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올리듯 엿 먹는 순간순간이 피어 올리는 뜻밖의 환희. 그러니 래퍼 차붐(32)이 "매일이 현실 버전 참이슬 라이프… 까짓 밀가루 손에 묻혀 엿 바꿔 먹지"라고 노래 '엿'에서 부르짖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 비극의 초탈을 위한 주문(呪文)일 수 있겠다. "엿, 엿, 이거나 챙겨가." 이 맛에 수능 시즌 서울 조계사 스님이 신도들에게 엿 주고, 농촌진흥청장이 고교생들에게 엿 주고, 걸그룹 멤버들이 엿 선물 영상을 찍어 올린다. 겨울, 엿의 계절이 왔다. 이제는 제발 좀 붙어야 할 때, 입에 쩍 달라붙어 달콤해지는 순간이 있어야 할 때, 허약해진 저작근이 더는 이 악무는 것조차 버거울 때, 당신에게 엿 먹이고 싶다.

엿 만드는 순서는 이러하다. ①밥으로 식혜를 만든다. ②담근 식혜를 당화한다. ③또 끓여 조청, 식혀서 갱엿을 만든다. 이 과정에 들어가는 피로와 정성이야말로 엿을 금빛으로 바꾸는 마법이라 할 것이다. ④전남 담양 ‘고재구 전통 쌀엿’의 고강석(오른쪽)·고환석 형제. 완성된 갱엿을 서로 발바닥 맞붙이고 영차영차 늘였다 접었다 하다 보면 형제의 우애도 엿처럼 끈끈해진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엿 만드는 순서는 이러하다. ①밥으로 식혜를 만든다. ②담근 식혜를 당화한다. ③또 끓여 조청, 식혀서 갱엿을 만든다. 이 과정에 들어가는 피로와 정성이야말로 엿을 금빛으로 바꾸는 마법이라 할 것이다. ④전남 담양 ‘고재구 전통 쌀엿’의 고강석(오른쪽)·고환석 형제. 완성된 갱엿을 서로 발바닥 맞붙이고 영차영차 늘였다 접었다 하다 보면 형제의 우애도 엿처럼 끈끈해진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추위가 엿 먹일 때?

연일 한파가 계속되고 있으나, 엿의 제철은 역시 이맘때다. 만들 때 너무 덥거나 습기가 많으면 엿에서 '땀'이 흘러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 호박엿·황골엿·꿩엿 별의별 엿이 다 있지만 엿 하면 떠오르는, 그 굳고 정하다는 흰 가락엿은 그러니 겨울의 것이다. 지난 8일 전통 쌀엿을 만들러 전남 담양으로 내려갔다. 마침 눈이 엿가루처럼 날리고 있었는데, 영하야말로 엿 되기 딱 좋은 날씨.

고강석(59)씨와 동생 고환석(51)씨가 아침부터 엿을 늘였다 접었다 반복하며 엿에 바람을 넣고 있다. 대대로 집에서 만들어 팔던 것을 5년 전부터 공방을 지어 본격 생산에 나섰다. 고씨가 "조선시대 양녕대군이 이곳으로 낙향했을 때 시녀들이 궁중식으로 엿을 만들면서 동네에 퍼졌다"고 한다. 엿의 역사는 유구하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맥락(麥酪)'을 엿으로 간주한다. 왕의 다과상에 올라가던 엿. 조선시대 문인 이식이 쓴 시 중에 "엿을 고아 늙으신 어머니께 올리고"라는 구절도 있다. 엿은 예사 씹을 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엿은 쉽게 말해 식혜를 오래 끓인 것이다. 식혜 온도가 중요한데, 너무 뜨거우면 엿이 밍밍하고 너무 차면 시다. 고씨의 경우 매일 쌀 50㎏으로 고두밥을 지어 식혜를 안치고, 9시간의 당화(糖化)를 거친다. 새벽에 일어나 건더기 거른 식혜를 3시간 더 끓이면 조청이 된다. 엿이 되려는 기미는 '엿발'이 설 때 알 수 있다. 끓이다 주걱으로 떠서 일어나는 흰 끈이 입김을 불었을 때 끊어지지 않고 나풀거릴 정도의 단단함을 얻을 때가 그때다. 이제 30분쯤 더 식히면 갱엿. 옛 가마솥에 나무를 때는데, 매년 100t 정도를 쓴다고 한다.

갱엿 한 덩이(1㎏)에 다진 생강과 볶음 참깨를 넣고 늘였다 접었다 반복하면 색깔이 하얗게 되면서 우리가 익히 아는 엿같이 변한다. 고씨 형제가 서로 발바닥을 붙이고 앉아 앞뒤로 반동을 줘가며 엿을 꽜다가 폈다가 반죽한다. 맨손으로 하면 엿에 붙은 손바닥 껍질이 벗겨지기 쉬워 장갑을 낀다. 엿 늘이는 곳은 따뜻한 방, 엿 자르는 곳은 난방 안 되는 찬방. 냉온을 오가며 엿을 주무르던 고씨가 "겨울철 시험 기간이나 연말연시에 매출 대부분이 나오다 보니 요즘엔 하루 3시간밖에 못 잔다"며 눈을 비빈다. 대부분 서울·부산 등 도시에서 옛 맛 못 잊은 이들이 소비층. "최근 일본에서도 대량 주문이 들어온다" 한다. 언제적 엿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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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의 운명을 바꾼 1964년 12월 서울 전기중학입시 시험 문제.

엿으로 엿보는 세상… 현재형의 엿

그러나 엿은 지극히 현재적이다. 전국 고교생의 건곤일척, 2월 대학 입학이 결정되기 전까지 엿은 유효할 것이다. 5·7·9급 국가공무원 공채 선발 계획도 발표됐고, 붙거나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의 기로에서 끈적함을 찾게 될 것이므로. '영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조 과거시험장에서도 엿을 팔았다. 엿은 스트레스성 복통 예방에 훌륭한 음식이고, 당이라 뇌 활동에도 좋으니 시험과 찰떡궁합인 까닭이다. 파리바게뜨가 만드는 수능엿 '합격소망엿' 매출은 수능 시험을 낀 11월 한 달 동안에만 관련 제품 연간 판매액의 65%를 차지한다고 한다.

엿은 발음의 유사성 탓에 대표적 영어 욕설의 대체어로 쓰이고 있으나 사연이 있다. 1964년 12월 7일, 서울 전기중학입시 자연과목 문제.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①디아스타아제 ②무즙 ③꿀 ④녹말. 출제위원이 녹말 분해 효소 '디아스타아제'만을 정답으로 처리하면서 진짜 문제는 시작된다. 공교롭게도 18번 문제였고, 무즙은 디아스타아제를 함유하고 있다. '무즙 파동'이 일어났다. 교육청을 찾아간 학부모들이 "엿 먹어라! 이게 무즙으로 만든 엿이다!" 외치면서 "엿 먹어라"가 모욕의 언어가 됐다는 설(說)이 가장 유력하다. 이듬해 법원 판결로 '무즙'을 정답으로 고른 학생 38명의 특별 전학이 성사됐고, 서울시교육감이 사표를 내면서 엿은 운명적 당락의 매개가 된 것이다.

①한국민속촌 ‘대형 잉어엿 뽑기’ 1등 상품이 바로 저 월척이다. ②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의 한국판 특별 포스터. 우나영 작가가 단원 김홍도 ‘씨름’을 마블식으로 재해석해 만든 이 그림에서 신(神) 로키는 엿장수로 변신했다. ③엿장수 윤일권씨와 아버지 고(故) 윤팔도씨, 아들 윤경식씨(왼쪽부터).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윤일권
①한국민속촌 ‘대형 잉어엿 뽑기’ 1등 상품이 바로 저 월척이다. ②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의 한국판 특별 포스터. 우나영 작가가 단원 김홍도 ‘씨름’을 마블식으로 재해석해 만든 이 그림에서 신(神) 로키는 엿장수로 변신했다. ③엿장수 윤일권씨와 아버지 고(故) 윤팔도씨, 아들 윤경식씨(왼쪽부터).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윤일권

그 옛날 엿의 추억은 현재형으로 살아 있다. 경기도 용인 한국민속촌에 가면 대형 잉어엿 뽑기가 한창. 내년 4월 1일까지 열리는 '추억의 그때 그 놀이' 행사 일환이다. 어릴 적 오락실과 문방구에서 성행하던 복불복 '숫자 뽑기' 1등 상품이 바로 대형 잉어엿 되시겠다. 설탕을 녹여 만든 가로 길이 60㎝에 육박하는 황금빛 월척을 낚아올릴 때 관광객은 나이를 엿 바꿔 먹는다. 입안에 들어가 치아를 누렇게 물들이며 혀의 미뢰를 일시적으로 해이하게 하는 엿은 이 때문에 개구쟁이와 어울린다. 잉어엿 뽑기를 담당하는 하효정(25)씨는 "초등학생 때 문방구에서 대형 잉어엿을 뽑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면서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 세대가 특히 좋아하는데 과거를 설명하며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산이 변하면 엿 맛도 변하는 법. 엿이 약이 되기도 한다. 2013년 출시된 엿 브랜드 '엿츠'는 "전통 엿을 사탕처럼 간편하게 먹을 순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태어났다. 산청한방약초연구소와 제휴해 엿에 한약재를 넣는 기술을 개발했고, 홍화씨를 넣은 '세월이 엿 먹일 때'나 뽕잎을 넣은 '시험을 엿 먹일 때'처럼 효능별 5종류를 만들어 내놨다. 부산에서 한의원을 하고 있는 권창준(55)씨는 먹기 편리한 한약을 고민하다 일종의 '엿 같은 약'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길경·감초·박하·천궁 등 한약 엑기스에 조청을 섞어 개별 포장해 파는 엿. 야근 잦은 직장인이나 수험생, 운동족 등을 겨냥해 '목 편한 엿' '몸 편한 엿' 등을 만들었는데, 지난 9월 카카오메이커스에 시판하자마자 6회 완판, 매출 1억원을 기록한다. 내년부터는 설 선물용으로 신세계백화점 서울·대구·부산에 입점이 예정돼 있다. 올리브영 등에도 내년 들어설 것이라 한다. 이 엿을 만드는 회사 '웰러'를 따로 차려 운영 중인 박경화(53)씨는 "시장조사를 계속해 '숙취 해소용 엿' 등을 더 내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代 이어 가위질… 엿장수는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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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의 전통 쌀엿과 조청.

엿 얘기하는데 엿장수를 빼먹을 수 없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평양감사향연도'나 '씨름'에도 엿판을 들고 엿 팔고 있는 엿장수가 등장하니 말 다 했다. 요새 누가 엿판 들고 전국을 돌까 싶겠지만, 아버지 윤팔도씨를 이어 엿장수의 삶을 살고 있는 윤일권(45)씨가 그런 경우다. 엿장수로 이름을 날린 부친이 지난 2월 세상을 뜨면서 부자(父子) 엿장수의 바통은 윤씨와 아들 윤경식(23)씨가 이어받았다.

충북 청주에 있는 '윤팔도 전통엿'이 그가 차린 회사. 예식이 간소화되면서 폐백이 줄어 매출도 덩달아 줄었지만 "그래도 1년 매출이 10억원쯤 된다"고 주장한다. 어엿한 회사 사장님이지만 엿가위를 들고 전통시장이나 축제를 떠도는 진짜 엿장수인 그는 이른바 쌍가위질을 구사한다. "쌍으로 쳐야 가락이 나오거든요." 엿가위 손잡이가 큰 이유는 공명을 크게 하려는 것이고, 탄성이 강해야 '챙챙' 소리가 멀리까지 잘 나간다. 윤씨가 "옛날에는 고물이랑 엿을 바꿔 먹었잖나. 고물상을 겸했던 아버지가 덤프트럭에 들어가는 판스프링을 대장간에서 녹여서 하이스강(鋼)으로 가위를 만들었다"고 한다. 숟가락, 부러진 국자 등이 곧잘 엿이 됐고, 이것이 엿장수 타령에 들어가 있다. 경남 함양엔 이런 '엿장수 타령'이 전해진다. "엿 사시오. 엿 사시오… 영감 할마니 싸우다가 담배 꼭다리 부르진 거, 큰애기 오줌살에 방짜 요강 구멍 난 거, 신랑각시 싸우다가 비녀 꼭다리 부러진 거… 가지고 나오세요. 나오세요!"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솜씨로 국악 장단을 마스터한 윤씨는 매년 전국의 장터와 축제를 누빈다. "울산부터 강릉까지 불러주면 전부 갑니다. 어린 친구들에게 엿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려고요. 애들이 전통이랑 친해지게 하려고요." 그러니 일곱 살 때부터 엿 가위질을 배웠다는 딸 윤송이(20)씨도 덩달아 엿장수의 운명을 걷게 된 것이다. 왜? 엿장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