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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91세 비뇨기과학 거목 김영균 박사가 얘기하는 건강 100세인의 조건

입력 : 2016.03.03 15:39

[건강 멘토] 91세 비뇨기과학 거목 김영균 박사가 얘기하는 건강 100세인의 조건

김영균 박사는 우리나라 ‘비뇨기과학의 선구자’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격변 속에서 감행한 비뇨기과 의사 최초의 미국 유학길은 전립선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던 우리나라 의료계에 최초로 전립선질환의 진단과 치료법을 알리게 된다. 

김영균 박사

김영균 박사는 인터뷰 도중 황급히 아내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그는 15년 전부터 시니어타운인 삼성 노블카운티에서 아내와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89세인 아내가 며칠 전 다리를 삐끗했는데, 로비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자 아내가 시장할까 걱정됐는지 한달음에 아내를 휠체어에 싣고 돌아왔다.

 

이곳 생활은 어떠세요?

좋죠. 세 끼 밥 차릴 필요 없고, 운동시설과 의료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서 아내와 여생을 보내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집사람이 고생을 정말 많이 했죠. 지금이라도 그 아내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65세 정년퇴임을 하고, 사립 의과대학에서 더 오랫동안 의사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비교적 빨리 은퇴하고, 한국전립선관리협회도 명예직만 남겨놓은 것은 여생을 아내한테 집중하면서 살자는 의도도 있었어요. 그래도 작년까지는 매일 서울을 오가며 친구들도 만나고, 후배들도 만나고 그랬어요. 그런데 한번 씩 외출하면 몸살이 나서 자중하고 있습니다. 하하.

 

미국행 결심했을 때, 부인이 걱정 많이 하셨겠어요.

‘2910’. 제 첫 여권번호입니다. 발행일이 단기 4286년 8월 22일이었죠. 그땐 서기가 아니라 단기를 썼습니다. 남들이 다 뜯어말리는 미국행을 결심했을 때 아내한테 정말 미안했죠. 백일 된 갓난아이까지 두고 오니 미국으로 향하는 17일 동안 울컥울컥 눈물이 났습니다. 비행기 탈 형편이 안 돼서 S.S. 시서펀트(Sea Serpent)라는 이름의 화객선을 타고 갔는데, 멀미도 많이 했습니다. ‘내가 괜한 짓을 저질렀어, 집에서 편하게 있을 것을…’ 하면서 후회하다가 이러면 안 되지 싶어 ‘3년을 약속했으니 견뎌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았지요. 미국에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제 고집과 노력이었어요. 미국 병원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이 병원 저 병원에 무작정 편지를 계속 보내던 차에 연락이 닿은 곳이 필라델피아 종합병원이었습니다.

 

미국생활은 어떠셨어요?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죠. 필라델피아종합병원은 시립병원이다 보니 환자는 많고 공부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때 전립선질환에 대한 진단과 치료를 처음 보게 됐지요. 1년 반이 지났을까, 운 좋게도 지금도 최고지만 당시 세계 최고의 명문 존스홉킨스병원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립선비대증과 전립선암, 특히 전립선암의 발생기전과 그에 대한 내분비요법(현재 쓰고 있는 호르몬요법)을 확립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허긴스 교수의 직계 제자인 스콧 교수에게 전립선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지요.

 

미국에서 의사로 계속 남으셔도 되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럴 기회도 있었죠. 어느 날 스콧 교수가 호출했어요. 펠로십을 마치고 제가 원한다면, 레지던트를 시켜주겠다는 기막힌 제안이었죠. 하지만 그 좋은 기회보다는 ‘3년 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돌아가겠다’는 아내와의 굳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어요. 물론 황무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 의료 수준도 눈에 아른거렸고요. 약속대로 1956년 1월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의사를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라 한동안 백수처럼 지냈죠. 그래도 배운 것을 가지고 환자들은 돌봐야 했기에 경전병원(경성전기주식회사, 現 한전병원의 전신)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전립선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국내에서 어려운 것이 있으면 일본과 교류하며 전립선학에 대한 연구를 서서히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김영균 박사 내외분

김영균 박사의 미국 유학 성과로 한국은 전립선학의 체계를 잡을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이미 전립선 건강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으며, 일본의 사정도 비슷했다. 일본은 군마대학의 시다 교수가 은퇴 후에 전립선재단을 만들어 고군분투하는 현장을 여러 번 방문해 목격한 바 있어 스스로 전립선 관리협회를 만들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호암상 의학상 최초 수상자셨는데, 상금을 바로 학교에 기부하신 일화는 아직도 유명합니다.

협회를 만들려면 돈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어요. 때마침 1991년 제1회 호암상 의학상 부문에 선정이 됐고, 거금 5000만원을 상금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집사람하고 의논 한마디 없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발전 기금으로 기증해버렸어요. 의술은 혼자 베푸는 것이 아니거든요. 모두가 노력해 이룬 결과를 저 혼자의 공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대신 저는 호암상을 계기로 호암재단을 찾아 전립선협회의 취지를 전하고 직접 원조를 청했습니다. 사실 크게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의외로 많은 관심을 보여주는 거예요. 호암재단은 물론 제약사나 다른 동료의사들이 뜻을 모아주었습니다. 일이 되려니 그렇게도 되더군요.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김영균 박사

그렇게 백방으로 모인 기금이 지금 한국전립선관리협회 탄생의 바탕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도움의 손길은 이어졌다. 1995년 11월 27일 한국전립선관리협회가 설립되었고, 김 박사는 초대 회장을 맡게 된다. 2001년 2월 권성원 교수를 제2대 회장으로 영입하면서 지금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최근에 《의학산문》이라는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슬슬 간단하게라도 자서전이라도 하나 쓰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끈질긴 권유에도 불구하고 저는 자서전은 쓰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후학들에게 또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자서전을 하나 못 낸다는 것은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 대신 저는 그동안 신문과 방송에 기고한 내용을 중심으로 ‘건강 100세’를 위한 산문집을 내기로 결심하고 완성을 했습니다. 건강에 대한 얘기가 428꼭지고 제 얘기가 56꼭지입니다. 단편으로 구성해놓아서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되고, 어느 쪽를 펴더라도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게끔 구성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물론 뒤에는 아주 조금 제 개인적인 얘기를 담았어요. 미니 자서전이랄까요. 제 자서전을 요약하면 “김영균은 아버지 김교희와 어머니 오금순 사이에서 1926년 4월 2일 서울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나서, 1951년 11월 4일 정용희 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정도랄까요. 하하.

 

집필활동은 계속 할 계획이신지요?

노블카운티에 입주해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도서실이었습니다. 지금 집무실로 쓰는 곳이 도서실 부속 연구실이고, 당시 입주민들의 이삿짐에서 나온 귀한 책들이 하나둘 쌓여서 지금은 아주 그럴싸해졌습니다. 연구실은 저에게 노후의 안정과 함께 희망과 목표를 안겨주었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연구실에서 작업을 합니다. 늦은 밤이든 새벽이든 문득 생각이 나면 내려와 책상 위에 작은 조명등 하나 밝히고 사색에 잠기거나 글을 읽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이번 책을 마무리하면서 고민이 하나 생기기도 했습니다. ‘책을 다 마치면 무엇을 하면서 소일을 하지?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하고 말이죠. 그래도 이런 공간과 주변의 관심과 격려가 있기에 책을 계획대로 출간하게 되었어요. 또 다른 책을 쓴다는 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대신 못한 공부를 좀 하면서 다른 일들을 모색해보려고요.

김영균 박사

김영균 박사는 91세의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고 맑았다. 꼿꼿한 허리와 밝은 표정, 그리고 가끔씩 던지는 농담과 커피를 직접 내어오는 친절함까지 모두가 부러워할 건강 100세인의 모습이었다. 점심시간이 많이 지나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매번 여기서 식사하면 질리지 않으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매번 식단도 바뀌고, 아내가 매번 밥을 차리고 치울 필요 없어서 편합니다. 여기 모두 노인들이라 밥을 많이 주지 않아요, 하하. 기자들은 밥을 한 공기씩 더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참 후식으로 커피와 차가 있는데 어떤 걸 준비할까요? 우유도 준비할까요?

 

젊은이들 식사도 이렇게 직접 챙기실 만큼, 91세의 연세가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건강 100세’가 요즘 화두입니다.

생로병사는 우주의 진리이자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생물학적 한계를 분명히 지니지요. 100세까지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한 몸을 가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흔히 건강장수를 보장하는 것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 소인 70%, 생활습관 등 스스로의 노력이 30%라고 얘기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건강 100세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지요.

 

건강 100세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우선 인지능력이 정상이고, 식사와 취침, 목욕, 화장실 사용, 독서 등 자신의 일상을 불편함 없이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둘째는 고혈압, 당뇨병 같은 질병이 있더라도 치료나 투약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어야 하지요. 셋째는 경미한 인지장애가 있더라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넷째는 암에 대한 얘기인데요. 유방암, 전립선암, 갑상선암 등은 돌아가신 후에 발견되는 일이 흔한데, 이런 암을 천수(天壽)암이라고 합니다. 즉 암에 걸려도 인지하지 못하고 건강하게활동한 분들의 얘기입니다.

 

<헬스조선> 독자들에게 건강을 위한 조언을 해주세요.

지금까지 생활보다 조금 더 개선되고 열린 생활을 위한 마음가짐을 제안하겠습니다. 먼저 마음의 불안과 스트레스, 욕심을 터십시오.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고집을 피우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 불안이고 스트레스입니다. 둘째는 남을 시샘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우습게 대하지 마십시오. 대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도우세요. 셋째는 과식과 과음은 금물입니다. 대신 아주 가끔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즐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과 자주 어울리고, 유산소운동을 생활화하세요. 저는 요즘같이 추운 날씨에는 실내에서 200m 트랙을 땀이 날 때까지 걷습니다. 걷는 것은 어떤 의사를 막론하고 추천하는 최고의 건강법입니다. 끝으로,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하십시오. 저는 요즘 천자문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가끔 이 나이에도 처음 보는 한자를 보면 희열을 느끼기도 합니다. 시간이 남을 때 독서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행복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