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2.10 17:19 | 수정 : 2015.12.10 18:38 남해에는 10일 새벽부터 겨울비가 내렸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 STX조선소 앞. 아침 8시가 가까워졌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갈수록 빗방울은 더 굵어졌다.
검은 피부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무표정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STX조선해양’이라 쓴 통근 버스가 5분에 한 대씩 직원을 내렸다.
회색과 아이보리 색이 섞인 작업복 왼쪽 가슴에는 ‘STX조선해양’이란 글귀가, 오른쪽 가슴에는 소속 부서가 적힌 명찰이 붙어 있었다. ‘기술로, 바다로, 미래로.’ 작업복 왼쪽 팔에 박음질된 파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 ▲ 10일 오전 8시 비가 내리는 STX조선해양 진해조선소 정문. /사진=조지원 기자
“이번 달엔 월급이 절반 나왔어요. 나머지는 언제 나올지...”
“아무 말도 물어보지 마세요. 저, 가볼게요.”
잿빛 얼굴의 조선소 직원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작업장에서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냥 일만 하는 수밖에...”
노란색 안전모를 손에 든 한 젊은 직원이 말했다. 출근도 하기 전에 녹초가 된 표정이었다.
아침 출근길, STX조선 직원들은 누구도 웃지 않았다. 칙칙한 하늘 만큼이나 어둡고 지친 표정이었다.
거제 대우 옥포조선소 출근길에도 잿빛 비구름이 잔뜩 끼었다.
정문앞 건널목에서 직원 수십 명이 파란 불을 기다렸다. 하지만 말을 섞거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은 없었다. 표정없이 앞만 바라봤다.
위 아래 노란 비옷을 입은 직원들이 자전거 페달을 밟아 빠른 속도로 조선소 정문을 통과했다. 잿빛 조선소로 무표정한 조선소 사람들이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 조선소들 구조조정 아우성
한국 제조업의 성공, 막강한 경쟁력을 상징하던 조선업계가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갯벌과 바다를 메워 세계 최고의 조선소를 건설한 한국 조선업의 신화가 물거품처럼 꺼지고 있다.
상무, 부장, 차장들이 줄줄이 짐을 싸고, 남은 사람들은 동결되거나 절반만 나오는 월급 명세를 받아 들고 가야 한다. 유치원, 대학 등록금, 체력 단련비 등 복지 혜택은 줄줄이 없어지고 있다. 하청 업체들은 일을 해도 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감이 떨어진 하청 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하고 있다.
STX조선해양은 12월 4일부터 인력 감축에 돌입했다. 임직원 2600명의 30%쯤 되는 800명이 회사를 떠나야 한다. 감축 목표는 정해졌고, 누가 나가느냐만 남았다. 12월11일까지 퇴직 접수를 받고, 남은 인력에 대해 권고 사직이 시작된다. 30명 임원의 절반인 15명도 짐을 싸야 한다.
2013년부터 채권단 관리를 받고 있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이 그동안 쏟아 부은 돈이 4조5000억원. 하지만 올해 1~3분기 3000억원이 넘는 당기 순손실을 냈다. 산업은행은 11일 추가 지원 방안을 논의키로 했다.
- ▲ 10일 내린 비로 STX조선해양 협력업체들은 작업을 중단했다. /사진=이정민 기자
올해 4조원이 넘는 영업 손실을 기록한 대우조선해양은 현금이 다 말라버려 11월 월급을 줄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 채권단의 긴급 수혈로 겨우 고비를 넘겼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투쟁, 투쟁, 선명성’을 외치던 노조도 임금 동결, 파업 중단 각서를 냈다.
위기를 간신히 넘긴 회사는 구조조정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임원 30% 감축, 부장급 이상 직원 1300명을 대상으로 감원을 진행했다. 현재 300명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났다. 회사는 나머지 사무직 직원들 숫자도 단계적으로 줄여나갈 방침이다.
회사는 헬기를 팔고, 연구소 지으려 사뒀던 땅도 팔고, 계열사도 팔려고 뛰어 다니고 있다. 위기를 넘기려면 하루 빨리 1조8500억원을 만들어야 한다.
◆ 채권단에 목매는 조선소들….“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는다"
성동조선해양은 더 어렵다. 회사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파도에 침몰했다. 2010년부터 5년째 채권단 관리중이다.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수출입은행은 2019년까지 4200억원을 추가 지원키로 했다. 올 해 8월부터 삼성중공업 위탁 경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회생 가능성을 높게 보는 조선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신규 수주가 어렵다. 회사를 팔려고 해도 팔 수가 없다. 살 만한 기업들이 다 궁지에 몰리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작년 3조원대 손실을 냈다. 올 해도 1조원 넘는 손실을 보고 있다.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임원 262명 중 81명이 짐을 쌌다. 과장급 직원 1500명도 회사를 나갔다. 망년회도 송년회도 없앴다.
삼성중공업에서도 올 해 임원 20명을 줄였다. 2분기에 1조500억원 손실을 냈다. 연중 내내 ‘퇴직의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임원은 임시직원’의 준말이 됐다.
조선업계 전문가들은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정부 주도의 채권단들이 조선 회사들의 부도를 막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돈을 쏟아부을 수 있을지, 그래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한 전문가는 "정부 돈으로 막고, 인건비 줄여서 극복 될 위기가 아니다"고 했다.
맡아 놓은 일감이 많아 당장 현금 부족 사태만 넘기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조선 회사들의 설명에 귀 기울이는 전문가도 거의 없다. 2~3년치 일감을 쌓아두고 있다고 하지만, 언제 취소될 지 모르는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 저유가 쇼크, 미국의 금리 인상, 연이은 국제 테러 등 대외 여건이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신규 발주가 말라가고 있다.
- ▲ 대우조선해양 직원들이 10일 거제 오션플라자 앞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 사진 = 허욱 기자
◆ 메이저 조선 3사 올해 목표의 60%...11월 실적은 최악
대우조선해양은 올 해 130억 달러, 현대중공업은 191억 달러, 삼성중공업은 150억 달러 수주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유가 급락, 해양플랜트 발주가 감소 등 악재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대우조선해양,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은 각각 43억달러, 116억달러, 100억달러를 수주하는데 그쳤다. 대우조선은 11월까지 목표의 35%, 현대중공업은 목표의 61%, 삼성중공업은 목표의 67% 달성에 그쳤다.
국내 전체 조선업의 11월 선박 수주량은 7만9834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에 그쳤다. 수주량이 ‘0’이었던 2009년 9월 이후 가장 저조했다. 중국은 146만CGT(60척)을 수주했다.
“내년 전망을 밝게 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상황이 좋아질 기미가 없다. 적어도 2년 간은 정말 어려운 시간이 될 것 같다. 몇 개나 살아 남을 수 있을까?"
한 대형 조선 회사 간부는 걱정했다.
“직원 자르고, 씀씀이를 줄이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출구가 보인다면 그래도 참을 수 있다. 더 고통스러운 건 지금의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직원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진실을 말하기 두렵다."
다른 대형 조선회사 고위 간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2015년 12월, 한국 조선업계는 그렇게 끝 모를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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