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에는 이렇게 떠벌리고 다녔다. "난 뭘 해도 될 거야." 삼십 대에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다녔다. "하는 일에 따라서 어쩌면 될지도 몰라." 지천명(知天命·50살)을 코앞에 둔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난 뭘 해도 안될 거야."
주변에서는 우려의 눈길을 보낸다. 아니 어쩌다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변하셨어요(예전의 교만 방자했던 때보다는 낫습니다만). 소생,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늘의 명까지는 잘 모르겠고 이제야 겨우 주제 파악이 되는 중이고 덕분에 사고가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은데 갱년기에 사춘기 우울증 환자 취급이라니. 미망에서 깬 것은 득도에 버금가는 경사이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으니 이 또한 칭찬받아 마땅한 일 아닌가. 사실 세상 대부분의 분쟁은 자기 자신을 과대하게 평가하고 있어서 발생한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제대로 취급받지 못했다고 분개한 끝에.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나'의 존재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하필 인간이란 종(種)이 참 어이없는 존재여서 (양보하더라도 최소한 남자라는 종족만큼은) 남에게 인정받는 일을 목숨을 건 투쟁 수준으로 중하게 여기는 기질이 있어 문제는 본격적으로 심각해진다.
층간 소음 문제로 위층과 다툰 끝에 위층 소유 차량의 타이어에 펑크를 내고 열쇠 구멍에 접착제를 발라버린 판사님이 계셨다. 아마 이랬을 것이다. 내가 판사인데 감히 나를 무시해? 그분은 법정에서는 판사지만 동네에서는 그냥 이웃 주민이었을 뿐이다. 판사의 권위를 일상생활에서까지 인정받고 싶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아들이 술집 종업원들에게 몇 대 쥐어 터졌다고 득달같이 달려가 '아구통'을 날리신 회장님도 있었다. 아들을 사랑한 것인지 자신의 권위를 사랑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심각한 겸손 결핍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너나 나나 죽으면 한 뼘 땅에 묻혀 썩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판사님이나 회장님같이 특별한 분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동창회 같은 데 나가보면 그런 증세를 보이는 놈이 하나둘 꼭 있다. 화제가 그쪽이 아닌데도 뜬금없이 자기 자랑을 끼워 넣어 내러티브를 교란시킨다. 그래도 성에 안 차면 "이거 내가 쏜다"고 설치기도 한다(이런 건 매우 바람직하다). 누구나 소중한 존재인 것은 맞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나한테나 소중하지 남한테는 하나도 소중하지 않다. 그 사실을 저만 모른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역으로 생각을 해 봤다. 고개를 미리 숙이면 혹시 익는 게 빨라지지 않을까. 겸손하면 상대방도 친절할 것이고 친절은 협조를 동반할 것이니 나쁠 일이 없다. 물론 겸손을 이해하지 못해 '을(乙)'의 처신으로 읽는 멍청한 인간도 있다. 이런 인간은 속해있는 조직과 자신의 능력을 혼동하거나 출신 학교가 자기를 대변한다고 믿는 삼류들이다. 그 조직을 벗어나거나 학력이 별로 중요치 않은 상황이 되면 견디지 못한다. 결국 사고를 친다. 사고를 안 치더라도 내가 왕년에, 소리를 늘어놓아 '꼰대' 소리를 듣는다.
이런 경구도 있지 않은가. 꼰대는 성공담을 자랑하고 멘토는 실패담을 들려준다. 돌아보면 내가 한 일이라고는 결국 나이 먹은 게 전부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뭐 하는 분이세요?" 묻기에 "그냥, 사는 사람입니다" 했다. 대답하고는 편안했다. 제일 끝자리에 앉아 한마디도 안 하고 듣기만 했다. 안주를 많이 먹어서 실속도 넘친다. 가운데 앉아 세사에 통달한 듯 떠들어 대는 저 멍청한 놈은 언제 사람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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