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당시의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장군 | |
한겨레저널 2003/04/11, 10:00:00 |
6,25당시의 손꼽히던 격전지 용문산 전투와 피의 능선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39세의 약관의 나이로 60만대군을 이끌던 전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5,16이라는 한국초유의 군사정변을 일으킨 반란군들을 맞아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의 운명 앞에서 조속한 민정복귀라는 엄격한 조건을 걸고 육참총장을 비롯 국방장관과 내각수반을 겸한 계엄사령관으로 역사의 광장에 섰던 사람,. 그 때의 심정을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란군과 진압군이라는 아군(我軍)끼리의 유혈(流血)은 막아야되겠다는 일념 뿐 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구테타 주모자들이 꾸민 연극 같은 재판으로 토사구팽 당한 그는 사형에서 무기 그리고 형집행 정지로 이어지면서 망명성 유학길에 오른다. 기나긴 고난과 시련, 도전과 극복,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조용한 승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노(老)장군 장도영 박사를 플로리다의 중심도시이며 국제적인 관광지인 올랜도에서 일요일이었던 지난 3월6일 정오 뜻깊은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장군께서 한국언론인들과의 만남(인터뷰)을 거부하는 사례가 많은데 어떤 연유에서입니까?"라는 필자가 던진 첫 질문에 장도영 박사는 조용하면서도 약간은 격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편견 없이 하는 인터뷰가 아니고 모두가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취재를 하려듭니다"라고 말하면서 왜곡된 진실, 5,16군사정변을 그들(반란군)스스로 미화해 놓은 제반 자료를 보고 그러니까 나에 관한 그 시점의 역사의 진실을 인위적으로 완전히 왜곡해 놓은 활자화된 정부간행물이나 기타문건을 포함한 날조된 재판기록들을 보고 와서 하는 편견을 가진 인터뷰이기에 오랫동안 거절해온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지금이라도 잘못된 역사를 고쳐야 되지 않겠느냐는 필자의 말에 그냥 웃음으로 대한다. 백발이 성성한 팔순의 노인으로 변모한 老장군이지만 미소를 지을 때는 스물여덟살에 별을 달았고 서른 아홉에 참모총장이었을 때의 그 시절 그 동안(童顔)의 미소가 재현되곤 했다. 장군은 참으로 오랫만에 인터뷰에 응했다. 이어 필자가 박정희씨나 김종필씨 등의 이름을 열거하며 "이젠 그 사람들을 용서하셨겠네요?"하고 묻자 "용서고 뭐고 있겠습니까? 그 때 그 시점에서는 그 사람들 나름대로는 자신들이 필요했던 인물로 스스로 착각(부각)했을지도 모르지요"라는 말로 애써 대신하며 하고 싶은 말을 아끼면서 대신 2년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 "망향"을 참작하라고 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나의 조속한 민정복귀방침과 그들(박정희를 포함한 주체세력들)의 장기집권 획책간의 충돌이 결국 <장도영 반혁명사건>이라는 터무니없는 드라마를 연출했던 소위 날조된 '연극재판'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박정희 장군의 구테타를 모의했고 또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참모총장으로써 사전에 알고 이를 방조 혹은 묵인했다는 주장도 있었다"며 이것 또한 소위 혁명주체라는 사람들이 꾸민 악랄한 간계(奸計)이며 그들이 날조한 모략이라고 못박았다. 회견 서두부터 너무 5,16문제에 집착한 질문만 하는 것 같아 화제를 잠간 이라크문제로 돌렸다. 명분없는 전쟁이라는 비난과 함께 연일 반전데모가 지구촌 곳곳을 뜨거운 열기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장군이 보는 견해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석유를 노리는 미국의 침략전임을 은근히 암시하는 기자에게 장도영장군의 견해는 달랐다. "도전이 아닌 응전입니다. 2년전에 있었던 9,11사태를 보셔야합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뉴욕에 있는 국제금융의 중심빌딩이 산산조각이 나질 않았습니까? 그리고 국방성의 일부가 테러에 의해 파손된데 대한 응전으로 보면 됩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필자가 '3개의 악의 축'중에 하필 이라크를 타켓으로 삼은데 대해 조금은 의의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이어 한국의 파병론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한국 국회의 이라크 파병결의는 잘된 것이라며 파병결정은 당연하고 시기적절한 당연한 조치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쟁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겠느냐는 말에도 장기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예민한 질문이기도 하려니와 본인의 말대로 예배를 마친 주일 오후에 하는 인터뷰라는데서 다소 부담을 갖는 것 같아 전쟁에 관한 질문에 조금은 피해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다시 화제를 바꾸었다. 정치성 망명 유학으로 첫발을 디딘 후 7년의 각고 끝에 어렵기로 유명한 미시간대학교에서 "월남공산주의 혁명의 본질과 그 특징"이라는 제목으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7년의 세월을 고생보다 더 고통스러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독속의 생활을 기도로 극복하며 오직 학업에만 열중했다며 모태신앙인 답게 기도의 힘을 말하는 그는 지금 올랜도한인장로교회에 평신도로써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있다며 인터뷰 내내 찬송과 성경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5,16당시 장군을 따르다가 반혁명 사건에 걸렸던 부하들의 근황은 수시로 듣고 있느냐는 질문에 "정말 좋은 질문을 하셨습니다"라고 반색을 하면서도 말을 채 잊질 못한다 가슴이 아픈 모양이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군에서 지휘관을 따른 죄밖에 없는 그들을 무차별 고문하고 무거운 형량을 씌워 지금도 연금을 못타는 불우한 처지에 있는 부하들의 불이익을 생각하면 때로는 잠 못 이룬다며 죄책감을 토하듯 긴 한숨을 쉰다. "박정희씨로부터 함께 있자며 귀국을 종용받았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냐?"고 묻는 필자에게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박정권이 가던 길은 정상이 아니라는 나의 변함없는 소신 때문에 단호히 거절했다"고 밝힌 그는 5,16이 났을 때 윤보선 대통령이 '올것이 왔구나'하는 말을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곱씹어본 날이 있었다고 한다. 대학교수시절 학교에서 귀가하고 이튿날 아침 방송을 통해 나오는 박정희 서거(逝去)소식이 전해 졌을 때 자신도 무심코 그 말을 해봤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그가 참으로 가련하게 생각되어 측은함을 느끼며 연민을 보냈던 사실을 고백했다. 질문 해볼 것이 많았지만 인터뷰날이 주일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우선 장군의 근황이나 독자들에게 전하고 다시 언제한번 만나 영욕의 부침 속에서 더러는 명장(名將)이 펼쳤던 무용담(武勇談)도 들어보자며 이날의 인터뷰자리를 마감했다. 자신이 받은 수많은 훈장 중에서도 군인으로서는 최고훈장인 두 개의 태극화랑무공훈장을 가보(家寶)로 남기고 있다는 장도영장군, 훈장과 별로 가득 찼던 군복은 어느새 곤색 정장양복으로 바뀌었으며 지휘봉을 들었던 장군의 손에는 성경이 들려져 있는 인간승리자 장도영박사, 더위에 휘청거리는 야자수 나무 밑에서 우리는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제39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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