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고액권은 안방 금고에 숨고… 정부는 "세금 천천히 내라"; 일본에서 최근 '오쿠리비토(億り人)'라는 말이 유행

미네소타 재테크 2016. 2. 15. 11:58

입력 : 2016.02.05 03:06 | 수정 : 2016.02.05 09:59

[오늘의 세상]
세계경제 23% 차지 유로존·日… 돈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 미래 불확실, 돈은 은행보다 집에
스위스 금고업체 밤새 공장 돌려 "50대 이상 개인이 많이 찾아"
- 은행에 맡겨봤자 보관료만 떼여
스위스, 세금 선납 할인 폐지… 은행서 대출 받을 땐 이자도 받아
- 주식·부동산 한때 활황
日 10억원 번 '오쿠리비토' 유행… 홍콩·호주 3년새 집값 20% 올라

①고액권이 금고에 숨는다

마이너스 0.75%라는 세계 최저 기준금리를 적용하고 있는 스위스에서는 금고(金庫)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취리히의 금고 제작업체 '디아니'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25% 늘었다. 밤낮으로 공장을 돌린다. 예금해도 이자가 안 나오기 때문에 현금을 보관하기 위해 금고를 구입하려는 수요가 넘친다. 스위스 언론은 "50대 이상의 개인이나 현금을 많이 돌리는 기업들이 특히 금고를 많이 찾는다"고 보도했다.

개인이 돈을 보관하려면 고액권이 편리하기 마련이다. 스위스에서는 단위가 작은 지폐를 최고액권인 1000스위스프랑(약 119만원)으로 바꾸는 게 유행이다. 유로존과 미국에서도 고액권이 인기 상한가다. 너도나도 현금을 고액권으로 바꿔 가정과 회사에 숨겨두다 보니 고액권 구경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고액권 화폐의 환수율(일정 기간에 발행한 액수 대비 중앙은행에 돌아온 비율)이 뚝뚝 떨어지는 통계에서 이런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미국에서 100달러(약 12만원) 지폐의 환수율은 2013년 82%였지만 2014년에는 75.3%로 떨어졌다. 500유로(약 66만원)의 환수율은 같은 기간 102.1%에서 88.7%로 하락했다.

기준 금리 낮은 국가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②세금을 일찍 내지 말라

정부기관이나 기업들은 받아야 할 돈이 가급적 천천히 들어오도록 유도하고 있다. 스위스 추크주(州)와 루체른주는 최근 세금을 미리 내면 일정액을 깎아주는 제도를 없앴다. 세금을 일찍 받아봐야 은행에 넣어두면 보관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세금을 천천히 내달라"며 호소하는 셈이다. 영국의 대형 유통업체들은 무이자 할부를 대거 확대하고 있다. 한 번에 물건 값이 많이 들어오면 골칫거리가 되기 때문에 조금씩 천천히 받고 싶다는 것이다.

개인들은 은행에 돈을 맡겨도 이자 받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큰돈을 미리 내거나 일시불로 결제하는 데 대한 저항감이 사라지고 있다. 영국 언론들은 교통카드인 오이스터카드에 큰 액수를 충전하는 경향이 점점 뚜렷해진다고 보도했다. 영국인들은 보험료·가스·전기료 등 공공요금의 분납(分納) 제도를 활용하려는 경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③예금에 보관료 내고 대출에 이자 받는다

덴마크에 사는 에바 크리스티안센이라는 여성은 시중은행에서 3년 만기 대출을 이용하고 있다. 은행이 제시한 대출금리는 마이너스 0.0172%. 돈을 빌렸으니 이자를 내야 상식에 맞지만 오히려 이자를 받게 됐다는 뜻이다. 크리스티안센은 돈을 빌려 쓴 사례금 개념으로 매달 7크로네(1251원)를 은행에서 받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소개했다.

덴마크에서는 수천 명의 집주인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마이너스로 적용받고 있다. 원리금을 갚을 때 마이너스 금리만큼 차감하고 할인된 액수를 내고 있다. 예금에 보관료를 물리기도 한다. 덴마크 에르베르브스은행은 2만6000명의 개인 예금 고객에게 이자를 주지 않고 대신 보관료를 받고 있다. 예치된 돈이 워낙 많아 골치라서 고객들이 예금을 빼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일본도 기준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면서 시중은행들이 적응할 채비를 하고 있다. 일본 최대은행인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은 대기업 예금에 계좌 수수료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자를 안 주고 보관료를 받겠다는 뜻이다. 인터넷은행인 소니은행은 보통예금 금리를 연 0.02%에서 0.001%로 대폭 낮췄다. 10억원을 1년간 맡길 때 세금을 떼면 이자가 1만원도 안 된다. 일본 3대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평균금리(10년 만기)는 연 1.05%인데, 곧 0%대로 떨어질 전망이다. 집을 사기 위해 1억원을 빌려도 한 달에 내는 이자가 8만원 정도에 그치게 된다.

④주식·부동산에 돈이 몰린다

일본에서 최근 '오쿠리비토(億り人)'라는 말이 유행했다. '억(億)'과 '인간(人)'의 합성어다. 주식 거래로 현금 1억엔(약 10억원) 이상 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난해 아사히신문에 오쿠리비토인 32세 남성이 집에서 종일 단타 매매를 해서 2억엔을 벌어들였고, 취미인 드럼 세트 구입에 300만엔을 썼다는 이야기가 나와 떠들썩했다. 초저금리 시대에 돈이 흔해지면서 갈 곳 잃은 돈이 주식 시장에 쏠려 나타난 현상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지속된 저금리 기조와 돈을 푸는 통화정책에 힘입어 주가와 집값은 큰 폭으로 올랐다. 미국 다우존스지수는 2012년 1만2000대였지만 작년에는 한때 1만8000선을 넘어서며 호황이었다. 유럽과 일본 증시도 큰 폭으로 올랐다. 부동산 가격도 소득 수준이 높고 금리가 낮은 나라들 중심으로 크게 올랐다. 덴마크에서는 작년 상반기에만 집값이 8% 올랐다. 홍콩·호주도 최근 3년 사이 20% 이상 집값이 상승했다. IMF(국제통화기금) 글로벌 주택가격지수(2000년 세계 평균 집값을 100으로 정한 지수)는 작년 1분기에 151.3으로 올라 역대 최고치였던 2008년 1분기(159.9)에 육박했다. 다만 올해 들어서는 유가(油價) 하락과 거품 우려 등으로 주가·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조정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라는 극단적 정책이 경기 부양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의견이 많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마이너스 금리는 실험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비상수단에 가까운 정책이므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마이너스 금리… 세계의 진풍경]

세계경제가 유례없는 초저금리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주 일본은행(BOJ)이 기준금리를 마이너스 0.1%로 낮췄다.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한 비상수단이다. 마이너스 기준금리를 도입한 곳은 일본을 포함해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덴마크·스위스·스웨덴 등 5개 경제권으로 늘어났다. 5곳의 경제 규모는 세계 GDP의 23.1%에 달한다.

기준금리가 마이너스라는 건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자금을 예치할 때 이자를 받기는커녕 보관료를 내야 한다는 뜻이다. 시중은행은 뭉칫돈을 중앙은행에 맡기기보다는 대출로 내보내야 손실을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은행 돈을 빌린 고객에게 은행이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주는(원금을 깎아주는) 기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예금이 많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나머지 예금 고객에게 이자를 주지 않고 오히려 보관료를 받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상식 파괴가 일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이너스가 아니더라도 1%대 이하의 기준금리를 적용하는 나라는 주요국을 중심으로 약 18개국에 달한다. 세계적으로 저금리 기조가 뚜렷하다는 얘기다. 미국·캐나다·영국이 0%대를 유지하고 있고, 아시아권에서도 한국·대만·태국이 역대 최저 수준인 1%대를 적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