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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원유 거래, 달러만 쓴다! 싫다! 위안화도 끼자

 

원유 거래, 달러만 쓴다! 싫다! 위안화도 끼자

[WEEKLY BIZ] [Cover Story] 50년 굳건 ‘페트로 달러’ 체제… 中 부상·사우디 변심에 흔들

 

그래픽=김의균

중동에 포연(砲煙)이 자욱하던 1973년 11월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 파이살(Faisal) 국왕을 접견했다. 이집트·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한 욤 키푸르 전쟁(4차 중동전쟁)과 그에 따른 ‘1차 오일쇼크’가 터진 지 한 달여 뒤였다. 표면적인 방문 목적은 이스라엘 편에 선 미국에 원유 공급을 중단한 사우디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서였다. 키신저 장관은 “중동 평화 구축에 힘쓰겠다”고 설득했으나 파이살 국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상은 키신저의 방문이 빈손으로 끝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막후에서 양국이 전 세계 명운을 좌우할 초대형 거래를 은밀히 진행했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미국이 사우디에 안보를 보장하는 대신 사우디는 원유를 오로지 달러만 받고 판매하는데 잠정 합의한 것이다. 1971년 금 태환(兌換) 중지 후 가치가 폭락하며 기축통화로서의 지위가 위태로워진 달러를 다시금 대체 불가능한 통화로 만들어준 이른바 ‘페트로 달러(Petro dollar)’ 체제의 막이 오른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지난 7일,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장소에서 상반된 장면이 펼쳐졌다. 미국과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는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사우디를 방문해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와 회담을 갖고, 원유를 위안화로 구매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시 주석은 사우디뿐 아니라 사우디 주도로 이번에 시 주석과 국가 간 협력 방안을 논의한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등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에도 원유의 위안화 결제 허용을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1970년대 이후 세계 금융 질서를 지탱해 온 ‘페트로 달러’ 체제의 와해를 요구한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사우디를 비롯한 GCC 회원국들은 시 주석의 요청을 당장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중동 내 정세가 종파 간 갈등, 경제적 이해 관계 등에 따라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가 높은 해당 국가들이 당장 중국 편에 서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9일 발표된 중국과 GCC 간 공동 성명에서 “원유의 위안화 결제를 허용한다”는 내용의 파격적인 문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중국은 사우디가 판매하는 원유의 4분의 1을 사들이는 ‘VVIP’ 고객인 동시에 사우디가 사활을 거는 핵 보유까지 도와줄 수 있다는 입장이어서 사우디를 필두로 한 GCC 국가들이 시 주석의 요청에 계속 등을 돌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게 시장의 지배적인 평가다. 시 주석은 이번 사우디 방문을 통해 사우디와 중동 국가들을 압박하며 향후 국제 원유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층 높인 셈이다.

 

특히 사우디 입장에서는 2010년대 이후 미국의 셰일 유전 개발로 중동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안보 문제가 불거지고 있고, 미 바이든 정부가 사우디의 비민주적 통치 체제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대미 관계가 껄끄러워졌기에 중국과 한층 깊은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에 지난 9일 미 월스트리트저널(WSJ)도 “2016년부터 위안화로 원유를 거래하는 방안을 추진해온 중국이 결실을 눈 앞에 뒀다”며 “페트로 달러 체제가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고 평가했다.

 

1970년대 이후 세계 금융 질서를 지탱해 온 페트로 달러 체제는 중국의 부상과 사우디의 변심(變心)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을까.

지난 9일(현지시각)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중국·아랍국가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악수하고 있다. 지난 7~10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시 주석은 10일 중국으로 돌아갔다. /연합뉴스
 

◇美 기축통화의 핵심, 페트로 달러

1970년대에 페트로 달러 체제가 등장하기 전에도 원유는 국제 관행상 달러로 결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35달러를 금 1온스로 교환할 수 있도록 규정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1944년 출범한 이후 달러가 영국 파운드화를 밀어내고 국제 무역 결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됐고, 2차 세계대전 후 미 석유 회사들이 전 세계 원유 시추·유통·판매 시장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러는 절대적인 결제 통화는 아니었으며, 상황에 따라 파운드, 독일 마르크 등으로도 결제할 수 있었다. 미국도 개의치 않았다. 화폐의 가치가 금에 의해 결정되는 ‘금본위제’하에서 자유로운 금 태환이 가능한 달러의 지위는 원유 결제와 관계없이 굳건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과 일본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했고, 해당 국가들은 세계 최대 생산국인 미국에서 제품을 수입하며 달러가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돌아오는 안정적인 통화 순환 체계가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면서 브레턴우즈 체제는 파국을 맞았다. 10년간의 전쟁에서 미국은 보유한 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달러를 마구 찍어내며 2500억달러 넘는 군비를 쏟아부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엔 재정 적자가 1500억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대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유럽 국가들은 앞다퉈 달러를 들고 달려가 미국에 금 태환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바꿔줄 금이 충분치 않았다. 결국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1년 8월 일방적인 금 태환 중단을 선언하자 세계는 대혼돈에 빠졌다. 달러 가치는 1년여 만에 20~30% 넘게 급락했고, 이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위기가 미국을 덮쳤다.

 

이때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하고,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미국이 낸 묘수(妙手)가 바로 페트로 달러다. 금을 얻으려면 달러가 있어야 했던 것처럼 필수 연료인 원유를 달러로만 구매할 수 있게 해 달러를 반드시 보유해야 하는 통화로 격상시킨 것이다. 당시 고유가까지 겹치면서 전 세계에는 원유를 구입하기 위한 엄청난 양의 달러가 필요했고, 미국은 무리한 통화 발행으로 값어치가 떨어진 달러에 대한 수요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로써 ①세계 각국이 달러로 중동에서 원유를 구매하고→②산유국은 쏟아지는 달러를 미 금융기관에 예치하거나 미 국채 등 미국 내 자산에 투자하고→③미국은 다시 이 돈을 상품 수입을 통해 세계에 뿌려주는 달러 순환 체계가 새롭게 확립됐다.

◇페트로 달러 도전했다 철퇴

페트로 달러가 미국의 패권 유지에 핵심 역할을 하면서 미국은 페트로 달러 체제를 위협하려는 국가에 매번 철퇴를 가했다. 미국이 2000년대 들어 이란·이라크·리비아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하거나 군사 행동을 벌인 데에는 테러 지원의심, 핵 보유 시도와 같은 표면적 이유 외에 해당 국가들이 원유의 달러화 결제라는 불문율을 깨려고 한 점도 한몫했다.

 

가령,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2000년대 초 원유 결제 통화를 달러에서 다른 통화로 바꾸려고 시도한 바 있는데, 공교롭게도 두 독재자는 몇 년 뒤 미국에 의해 각각 대량살상무기(WMD) 제조자와 반(反)민주주의 세력으로 지목돼 처단됐다. 이란과 베네수엘라도 달러 이외 통화로 원유를 판매하려 했다가 미국의 무차별 경제 제재를 받았다.

 

미국이 페트로 달러 체제 수호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여온 것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20년 7월 영국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팬데믹에 따른 수요 급감으로 궁지에 몰리자 원유 300만배럴을 위안화를 받고 중국에 판매했는데, 당시 달러인덱스는 7월에만 4% 넘게 하락했다. 2020년 하루 평균 원유 수요(9100만배럴)의 3%가량을 한 차례 거래한 것에 불과한데도 금융시장은 이를 심상치 않은 신호로 여긴 것이다. 국제안보분석연구소 갤 루프트 이코노미스트는 “원유 시장, 더 나아가 전체 글로벌 원자재 시장은 달러의 기축통화 유지에 보험과도 같은 영역”이라며 “그 벽돌을 빼면 (기축통화 지위라는) 벽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했다.

사우디 역시 페트로 달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사우디가 판매하는 원유의 4분의 1을 사들이는 ‘VVIP’ 고객인 중국이 지난 몇 년간 위안화 결제를 끈질기게 압박했는데도 응하지 않았던 이유다. 이슬람 수니파 리더인 사우디는 이란을 필두로 한 시아파 국가들과 일촉즉발의 군사적 대립을 하는 가운데 미군과 미국산 무기에 안보를 크게 의지하고 있다. 사우디가 수입하는 무기의 60%는 미국산이며, 중국산 비율은 1%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 경우 사우디는 심각한 ‘안보 공백’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수년 간 국제 정세가 급변하며 사우디로선 새 안보 전략 마련이 절실해졌다. 2010년대 들어 미국에서 대규모 셰일 유전이 개발된 후 중동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줄어들자 미국이 사우디의 안보 문제를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불만이 사우디 지배층 사이에 팽배하다. 여기에 바이든 정부가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의 배후로 빈살만 왕세자를 지목하자 오랜 우방(友邦)이던 미국·사우디 관계에 깊은 금이 생겼다.

 

이 틈을 파고든 중국은 미국에서 들여오기 어려운 군사용 무인기(드론)나 탄도미사일을 공급해주고, 핵 기술까지 전수해주겠다며 사우디에 바짝 다가서고 있다. 사우디가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며 중국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이다. 미 외교안보 매체 포린폴리시(FP)는 시 주석의 사우디 방문에 대해 “수십년 간 지속된 미국과 사우디 간 ‘일부일처 시대’의 종식이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최대 기로 놓인 페트로 달러

이 같은 사우디의 경제·안보 상황과 중국의 행보로 볼 때 견고한 페트로 달러 체제는 머지않아 균열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동 지역 및 사우디 전문가인 알리 시하비는 “사우디의 최대 고객인 중국이 원유 거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페트로 달러 폐기는 궁극적으로 불가피하다”며 “다만 시점이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국가들이 달러 대신 위안화 등 다른 통화로 원유를 결제한다 해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당장 흔들릴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지난 50년간 글로벌 금융 시장과 원자재 시장이 성장하면서 ‘페트로(원유)’의 위상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줄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만 해도 원유는 전 세계 선물(先物)시장에서 거래량이 가장 많은 상품이었으나 현재(2019년 기준)는 원유 관련 전 세계 일평균 거래금액(1519억달러)은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달러가 하루에 매수·매도되는 금액(5조8190억달러)의 2.6%에 불과하다.

친환경 기조의 확산도 원유의 위상 하락에 일조했다. 막대한 탄소를 배출하는 원유·가스 등 화석 연료 대신 태양광·풍력·수력·바이오 등 신재생 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 분야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전 세계 에너지 소비에서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1965년 94%에서 2020년 84%로 10%포인트 줄었다. 적극적인 친환경 정책을 펴는 유럽 국가 중에는 스웨덴(32%), 핀란드(43%), 프랑스(50%)처럼 화석연료 의존도가 절반 이하인 곳도 있다. 페트로 달러가 만들어진 1970년대에 원유는 ‘금’ 못지않게 소중한 자원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한국금융연구원 김정한 선임연구위원은 “국제 원유 거래가 전부 위안화로 대체된다 해도 전 세계 외환 거래 대비 원유 관련 달러화 사용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에 전 세계 외환 거래에서 위안화의 비중이 눈에 띄게 증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페트로 위안화’ 시대가 열린다 해도 위안화가 기축통화로 올라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이 밖에 오랜 기간 대규모 무역 적자를 감당하며 글로벌 경제에 충분한 통화 유동성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나라가 현재로선 미국이 유일하다는 점, 역사적으로 봤을 때 영국이나 미국은 경제·군사·정치·금융시스템 모두에서 강대국이 된 후에야 기축통화를 가질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도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왕좌를 상당 기간 유지할 것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NH투자증권 안기태 이코노미스트는 “영국과 한 번 이상 전쟁을 경험한 나라가 전 세계 195국 중 173국, 현재 미군 기지가 있는 곳이 80국에 달한다”며 “영국·미국은 이러한 수준의 세계 경영을 해 본 후에야 기축통화 지위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가열되는 美中 기축통화 전쟁

하지만 달러 패권을 흔들려는 중국의 시도는 사우디와 원유에서 그치지 않는다. 중국은 막강한 구매력을 앞세워 다른 중동 국가나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과도 원유나 광산물을 위안화로 거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최근에는 러시아와 손잡고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국가들의 통화금융 시스템 통합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6월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서도 브릭스 회원국 중앙은행과 상업은행들이 ‘위안화 국제결제망(CIPS)’에 참여하는 방안이 검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원자재 거래의 90% 이상이 달러로 결제되는 상황에서 자원 부국인 브릭스가 별도의 통화금융 시스템을 구축할 경우 달러는 적잖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페트로 달러의 균열이 당장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해도, 워낙 상징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에 미국이 이를 용인 또는 방관할지는 미지수다. 미국은 설령 우방이라 해도 달러의 위상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왔다. 1980년대 일본이 엔화의 국제화를 추진했을 때는 일본에 각종 무역 제재와 평가 절상 압력(플라자합의)을 가하며 달러 패권을 지켰다. 1990년대 후반 유럽 단일 통화 출범을 두고도 미국은 “유로화가 유럽을 다시 한번 전쟁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을 것”(마틴 펠드스타인 전 미국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이라는 독설을 퍼부을 만큼 예민하게 반응했고, 마침 코소보 사태가 터지자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NATO) 공습을 주도하며 내전을 국제전으로 키웠다. 전쟁 여파로 유로화는 1999~2000년 통화 가치가 20% 넘게 하락하며 초기 안착에 애를 먹었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는 “과거부터 미국은 달러와 석유에 대한 도전은 용서하지 않았다”며 “미국에서 셰일가스가 나오면서 ‘석유’에 대해서는 한 발 떨어져 대응하게 됐지만, 달러는 여전히 외부의 도전에서 지켜내야 하는 미국의 생명줄로 남아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