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전사들이 말하는 50년사
2011년 12월 5일 오후 3시 30분. 우리나라가 연간 무역 규모 1조달러를 돌파했다.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건국 63년 만이자 수출 1억달러를 돌파한 지 47년 만에 이뤄낸 기적이다.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전환했던 1960년 이후 오늘까지 수출 최전선에서 뛰었던 관료·기업인·근로자 5인(人)으로부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한국 무역의 50년 역사'를 들어봤다.
- ▲ 김정렴 前 청와대비서실장
◆1960년대 - 김정렴 前 청와대비서실장
수출 총사령관 박정희 대통령, 14년간 수출진흥회의 '개근'
1961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 빈곤 탈출에 나섰다. 하지만 집권 세력인 장교들은 민족의식이 강했다. 자주(自主), 자립(自立)을 강조했고 자유무역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당연히 산업정책도 수입품을 국산화하는 ‘수입 대체산업’ 육성에 집중했다.
1962년 자력 성장을 위한 내자(內資) 확보를 목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실패했다. 장롱 속 숨겨진 자금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또 만성적인 무역 적자에 대외 원조마저 끊기자 1964년에는 외환위기 우려까지 제기됐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우리 경제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대 정책 전환을 이룬다. 수출이 주도하는 대외개방형 경제로 방향 전환을 한 것이다.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장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64년 시장자유화조치라고 할 수 있다”며 “장기영 당시 부총리가 정책 초안을 잡고 박정희 대통령이 그것을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수입 대체산업 보호를 위해 낮게 유지했던 환율과 금리를 대폭 올리고, 무역·외환 거래를 제한하던 것을 과감히 철폐했다. 한국 경제를 개방형 수출구조로 전환하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극심한 반대 여론에도 일본과의 수교(1965년)를 맺은 것도 대외 개방 경제에는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때 들어온 대일 청구권 자금은 산업의 기초 자본으로 쓰였다. 월남전 참전(1964년)으로 유입된 자본도 경공업을 중심으로 수출산업 육성의 종자돈이 됐다. 그런 자본으로 건설한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이 산업화 초기의 수출품이었다.
1964년 11월 30일 저녁 11시 반 김정렴 전 비서실장(당시 상공부 차관)은 흥분된 목소리로 청와대로 전화를 돌렸다. 김 전 비서실장은 “장관이 출장 중이어서 내가 전화를 걸어 ‘각하, 수출이 1억달러를 넘었습니다’라고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의외로 ‘애썼소’라며 담담하게 말했다”고 회상했다. “박 대통령은 1965년 이후 14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135차례 수출진흥회의를 직접 주재한 수출 총사령관이었어요.”
- ▲ 성정순씨
◆1970년대 - 섬유공장서 일했던 성정순씨
추석·설 연휴만 쉬고 공장 일… 동생 5명 학교 보내고 결혼시켜
“추석과 설 연휴에만 쉬었고, 주말에도 매일 일했어요. 하루를 쉬기 위해서는 24시간을 꼬박 일해야 했어요. 잠은 쏟아지는데 일감은 계속 쌓여가고…. 옆에 있는 친구를 꼬집어가면서 일했죠.”
성정순(53)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7년 열아홉 나이로 대구의 태창섬유에 입사했다. 직원 100명 정도의 제직업체였다. 이곳에서 생산한 천을 의류업체에 납품하고, 그것이 다시 옷으로 만들어져 외국으로 수출됐다. 성씨와 같은 여공으로 대표되던 섬유산업은 1970년대 수출 비중의 30%를 차지하는 효자 산업이었다. 당시 근무는 주·야간 2교대였다. 아침 7시 출근~저녁 7시 퇴근, 저녁 7시 출근~아침 7시 퇴근 생활이 반복됐다. 요즘 말로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이었다.
숙식은 회사에 딸려있는 기숙사에서 해결했다. 6명이 한 방에 다닥다닥 붙어 잤다. 새벽에는 당번을 정해 연탄불을 갈았다. 성씨는 한 달 월급 7만~8만원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고향인 상주의 시골집에 보냈다.
“좋은 옷도 입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은 나이였지만 그런 데 돈을 쓸 수 없었죠. 특히 과자가 너무 먹고 싶어서 또래 여공들과 ‘우리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과자가게 가서 원 없이 과자를 먹자’ 이런 상상을 했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최고의 수출 업종은 섬유·봉제·신발이었다. 모두 노동집약적 공산품이다. 자본과 기술력은 부족했지만 인력은 남아돌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른바 ‘공돌이’ ‘공순이’로 불렀던 경공업 업종 직원들이 당시 한국 수출을 책임진 최고의 역군이자 전사였던 것이다. 이들의 12~14시간 노동을 통해 한국은 1977년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1974년 수출·입을 합쳐 100억달러이던 무역 규모가 1988년 1000억달러로 수직 상승하기까지 일등 공신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일해야 우리 집이 살고 나라가 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일해서 동생 5명 모두 고등학교 이상 졸업시키고 시집, 장가도 다 보냈어요.”
- ▲ 김형벽 전 현대중공업 회장
◆1980년대 - 김형벽 前 현대중공업 회장
아침 6시 조선소서 임원회의… 10년만에 日 추월 세계 1위로
1983년, 현대중공업은 전년도 수주 실적 1위였던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조선업체로 부상했다. 울산조선소를 준공한 지 10년째 해였다. 현대자동차는 1986년 고유 모델인 엑셀을 미국 시장에 처음으로 내다 팔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80년대 중화학공업의 도약은 1970년대에 뿌린 씨앗의 결과였다.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박 대통령은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이 선언을 전후로 생겨난 주요 중화학 단지를 보면 울산 석유화학단지(1972년), 여천 석유화학단지(1979년), 창원 기계공업단지(1978년) 등이 대표적이다. 기업으로는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1974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1975년), LG화학 여수공장(1976년), 호남석유 여수공장(1979년), 대우조선 옥포조선소(1981년) 등이다.
김형벽 전 현대중공업 회장은 “그때는 아침 6시에 조선소에서 그날 할 일에 대한 임원 회의를 열고 하루 2교대로 토·일요일도 가리지 않고 일했다”며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라를 일으킨다는 사명감이 있어서 피곤한 줄 몰랐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 중화학공업의 급성장은 전 세계에서도 화제가 됐다. 현대중공업은 선박 제조에 이어 선박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인 엔진 생산에서도 1987년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선박 제조·엔진에서 국산화율은 90%를 넘어섰다.
조선소를 준공하자마자 덴마크·프랑스·일본 기술자 수십명을 울산으로 초청해 한국 직원들을 가르치고, 매년 일본 가와사키중공업 등에 직원들을 연수 보낸 지 10여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김 전 회장은 “우리가 세계 1등을 한 뒤로 유럽·일본 등지 엔지니어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며 “기술 배우러 온 지가 언제인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추월할 수 있느냐고 (유럽·일본 조선소에서) 깜짝 놀라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 ▲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1990년대 -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공격적 투자로 반도체 시장 석권… 휴대폰 등 IT 경쟁력도 함께 성장
1984년 3월 삼성전자는 단 6개월 만에 우리나라의 첫 반도체 생산 라인을 완공, 세계 반도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일본·미국에서 반도체 기술을 도입해야 했던 한국이 기술 선진국보다 1년 이상 공사 기간을 단축했던 것이다. 컨설팅과 장비 납품을 하는 해외 기업들도 "6개월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다. 삼성 임직원들이 허허벌판이었던 경기도 기흥공장에서 텐트를 치고 숙식하며 24시간 밤샘 공사를 강행한 덕분이었다.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은 "한겨울 혹한기에 공사를 하는 바람에 콘크리트가 잘 굳지 않아 대형 히터를 곳곳에 틀어놓고 공사를 강행했다"며 "석유난로에서 나오는 그을음 때문에 항상 코 안이 새까맸다"고 말했다.
공장을 짓자마자 64K D램 메모리반도체 양산에 들어갔지만 처음엔 수율(收率·완성품 비율)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고(故) 이병철 회장이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서 수율을 체크할 정도였다. 하지만 수율에서 일본을 따라잡는 데도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1990년대 초 반도체 불황기가 닥쳤지만 삼성은 공격적인 투자로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반도체를 개발했다. 이윤우 부회장은 "일본 업체들은 외부 인재 수혈을 극도로 꺼렸지만 삼성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매년 1000명이 넘는 인재를 데려왔다"고 말했다. 한국 반도체는 지난 1977년부터 지금까지 누적 수출액이 3070억달러(약 347조원)에 달하는 한국 최고의 수출 품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 반도체를 통해 축적한 기술은 휴대폰과 LCD TV 등 다른 IT 분야에서 기술 주도권을 쥐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실제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은 199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반도체와 컴퓨터·휴대폰·LCD·자동차 등 첨단 제품 중심으로 재편됐다.
- ▲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2000년대 -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외환위기 돌파구로 FTA 택해 45개 경제대국과 교역 크게 늘어
1990년대 후반 한국 경제는 안팎의 위기를 맞는다. IMF 외환 위기로 국가는 부도 위기였다. 미국·일본 시장은 물론 중국·아세안 같은 신흥 국가에서도 한국 상품의 경쟁력은 떨어졌다. '세계 공장' 중국이 강력한 수출 정책을 펼치며 세계경제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한국 경제로서는 위기 극복을 위한 새 동력이 절실했다. IMF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 규모를 키워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결국 '무역' 외에는 길이 없었다. 2007년 한·미 FTA 수석 대표를 지냈던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수출이 한국 경제를 먹여 살렸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과거와 같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한계에 왔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가 IMF 위기 타개책으로 내세운 게 자유무역협정(FTA). 1990년대 중반부터 WTO를 중심으로 한 다자간 무역자유화 논의가 진전이 없자, 나라마다 양자 협상인 FTA를 추진했다. 당시 FTA를 맺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일본·몽골뿐이었다.
1998년 APEC 정상회담에서 칠레와 FTA 추진이 처음 논의됐다. 2000년부터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됐고, 2002년 타결돼 2004년 발효됐다. 이후 활발한 FTA 추진으로 우리나라는 미국·EU(27개국)·아세안(10개국)·싱가포르·페루·인도·EFTA(유럽자유무역연합 4개국) 등 45개 국가와 FTA를 체결했다. 우리와 FTA를 맺은 나라가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1%로 높아졌다. 또 우리의 전체 교역액 중 FTA를 체결한 국가 비중은 21.5%, 한·미 FTA가 정식 발효되면 35.2%로 높아지게 된다. 김종훈 본부장은 "2000년대는 위기를 기회로 만든 10년이었고, 그 중심에서 FTA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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